2022. 10. 28.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10 ‘교생 선생님’이었던 그녀, 폰트 디자이너 문하나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열 번째 인터뷰이

‘교생 선생님’이었던 그녀, 폰트 디자이너 문하나

 

 

 #미대생_아니고_사범대생 

 

“중학생 때 품었던 꿈, 내 글씨로 ‘문하나체’를 만들고 싶어!”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꿈과 직업을 고민했어요. 나는 뭘 하면 좋을까. 계속 이 생각만 했죠. 그러다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알게 됐어요. 그중에서도 시각 디자인 분야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타이포그래피도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모든 글자가 ‘누군가의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신선했어요. 그리고 한글은 정말 평화롭고 건강한 문화 유산이잖아요. 그걸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제 손글씨를 좋아하셨는데, 언젠가 나도 내 글씨로 [문하나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나 사범대학에 들어가고···”

 미술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어쩌다 보니 사범대학에 들어갔네요. 사실 스무 살에 입학했던 학교에서 전공은 디자인이었습니다. 서너 시간짜리 시각디자인과 수업을 듣다가 진이 빠진 적이 있는데, 디자인 프로그램을 익히는 수업이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게 맞았나? 문득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보다 왜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반수를 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커리큘럼을 봤는데 진짜 신나더라고요. 순수미술, 디자인, 미술교육 등등 정말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거든요.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차 올랐습니다. 여기서 배운 거 다 녹여서 디자인하면 ‘문하나’라는 디자이너의 캐릭터는 명확해지겠다! 결론적으로 저는 윤디자인그룹에 입사했으니, 만족해요.

 

“교생 실습 때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했었죠”

 사범대생 티를 조금만 더 내볼까요?(웃음) 교생 실습 얘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당시 저는 학과 수업이랑 독학으로 제법 열심히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학구열을 교생 실습 때도 반영해봤습니다. 제가 교습을 나간 학교의 학생들에게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쳤어요. 수업 이름이 ‘한 글자에 의미 담기’였습니다. 디자인에는 기획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점, 글자는 누군가의 디자인이라는 점, 이 두 가지가 수업의 핵심이었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생각을 좀더 확장시켜주고 싶어서 실기 과제도 함께했습니다. ‘똥’, ‘삶’, ‘죄’ 같은 한 글자 낱말을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각자 느낌을 담아서 저마다 새로운 ‘똥’, ‘삶’, ‘죄’를 써보도록 했죠. 그러고 나서 아이들의 글자 스타일을 모두 이어서 레터링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제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이 ‘문하나 교생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네요.(웃음)

 

교생 실습 때 학생들과 함께 작업했던 레터링 과제

 

“나태주 시인의 「풀꽃」, 그리고 [문하나체]”

 포트폴리오 준비 과정을 얘기하고 싶어요. 미대생이 아니지만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의도적으로 ‘사범대 출신 디자이너’임을 부각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줄곧 ‘미술 교육’과 ‘디자인’이라는 모두 녹여보고자 노력했어요. 디자인 과제에 ‘교육’을 넣어본다던지, 교육 실습 때 ‘디자인’을 가르쳐본다든지, 이런 식으로요. 아까 얘기했던 교생 실습 에피소드도 같은 맥락이었죠.

 

 졸업전시 작품에 꽤 공을 들였어요. 중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꿈만 꾸고 있었던 [문하나체]를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휴학 기간에도 글자 작업을 했고, 복학 후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시간을 내서 계속 글자에 매달린 끝에 2,350자 완성형 [문하나체]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보면 만듦새가 그리 견고하지는 않지만, 제게는 큰 의미가 있는 서체예요.

 

 당시 저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에 빠져 있었거든요. 나태주 시인이 원래 교육자셨고, 이 시가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마음이라는 걸 알았어요. 교생 실습을 마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시가 참 와 닿았습니다. [문하나체]로 쓴 「풀꽃」 포스터를 졸업전시에 선보이고 싶었어요. 직접 나태주 시인께 연락을 드려 시구 전재를 허락 받았습니다.

 

 대학 4년을 온전히 다 녹여낸다는 각오로, ‘교육’이라는 키워드를 ‘디자인’을 통해 보여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습니다.(웃음) 저처럼 미대생이 아니거나 디자인 비전공자인데 글자 디자인을 준비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죽지 말고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양한 경험을 한 디자이너는 매력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윤디자인그룹 TDC에는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 있답니다.

 

졸업전시 부스: 나태주 시인에게 직접 허락을 구해 제작한 「풀꽃」 포스터. 문하나의 손글씨체 [문하나체]로 시를 썼다.

 

 

 #폰트디자이너가_되고_보니 

 

“글자는 회사에서 배우는 게 진짜다, 라는 말”

 대학 시절 어딘가에서 “글자는 회사에서 배우는 게 진짜다”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 말 때문인지,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정말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글자를 공부했습니다. 회사에서 ‘실전’을 배우기 전, 학생 때는 글자에 대한 ‘흥미’를 확실히 내면에 꽉 꽉 채웠던 것 같아요.

 

 회사에 오면 디자인 프로그램부터 작도 방식과 규칙, 균형까지 모든 것을 배우게 됩니다. 현재 주기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모바일용 플립폰트(Flip Font)를 예로 들어볼게요. 플립폰트는 특성상 손글씨 결의 글자를 자주 만들게 됩니다. 그럴 때면 졸업전시가 떠올라요. 학생 때 어떻게든 글자를 만들던 시간들을 복기해보면서, 폰트 디자이너가 된 지금 내 눈앞의 실무를 차근차근 파악해보는 거죠.

 

 단지 2,350자 완성형과 11,172자 조합식 폰트의 차이가 아니더라고요. KS 특수문자, 베이직 라틴(Basic Latin) 등 일상에서 흔히 쓰는 글자는 생각보다 다양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그 영역들마다 작도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명확한 규칙이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완전히 숙련하고 난 뒤에야 얼마간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뭘 더 해볼 수 있을까’ 욕심을 부려볼 수 있는 디자이너로서의 여유 말예요. 제 경우는 기본기를 익힌 뒤에 라틴 알파벳의 ff나 fi 같은 합자 기능, 동일 계열 글자를 한데 묶는 클래스 커닝, 컬러 히든 딩벳 등등 테크니컬한 쪽을 더 배울 수 있었어요.

 

문하나가 작업한 플립폰트: [YD도토리편지], [YDUrbanNote]

 

플립폰트를 활용한 그래픽 포스터: (왼쪽부터) [YD도토리편지], [YDUrbanNote], [YDSpiffyNote]

 

 

“나의 인턴 과제”

 지난 일곱 번째 [글자-마음 보기집]에서 저희 김주희 디자이너도 언급을 했던데요. 윤디자인그룹 TDC에 입사하면 ‘인턴 과제’를 받게 됩니다. 제가 인턴일 때는 ‘라틴 알파벳 브랜드 로고 한글화’ 과제를 맡았습니다. 저는 원두커피 브랜드 ‘쟈뎅(JARDIN)’의 로고를 한글로 변형해봤습니다. 오리지널 로고의 닙(nib)으로 쓴 세리프와 획 대비를 한글에 녹여냈는데요. 라틴 알파벳 요소를 한글화하는 데만 집중하면 안 되고, 한글 자체에 대한 고민을 더 깊게 해야 하더라고요. 라틴 알파벳이 가로로 늘여놓는 방식이라면 한글은 모아쓰기 글자니까요. 탈네모 및 네모틀 구조, 이음줄기의 기울기나 길이, 자소의 곡선감 등 세세한 부분에서 한글의 결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윤디자인그룹 인턴 과제는 뭐랄까, 실무 투입 전 ‘몸풀기’ 같아요. 준비 운동을 통해서 기초 역량이 몸에 확실히 배도록 하는 과정이죠.

 

문하나의 인턴 과제: 원두커피 브랜드 ‘JARDIN’ 로고를 바탕으로 만든 한글

 

“글자를 다루는 일,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윤디자인그룹 TDC에서는 [안성탕면체] 전시를 준비 중인데요. [안성탕면체]는 ‘국민 라면’이라 할 수 있는 농심 안성탕면(安城湯麵)의 기존 한자 제품명을 한글로 대체하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 서체예요. 여섯 번째 [글자-마음 보기집] 주인공인 이해린 디자이너 주축으로 개발됐고, 올해 576돌 한글날을 기념해 농심이 무료 배포했습니다. 저희 TDC는 요즘 전시 준비를 하면서 계속 ‘안성탕면이라는 오랜 브랜드를 어떻게 글자로 녹여내야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이렇듯 폰트 디자인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트이는 것 같아요. 시야가 글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글자의 다양한 활용 방식, 글자로써 개척될 수 있는 틈새시장 등등을 주시하게 됩니다. 배울 게 많고 응용할 거리도 많은 이 직업!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평생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두근두근합니다. 늘 새로워! 늘 짜릿해!(웃음)

 

[안성탕면체], 2022

 

“습관이 축적되면 영감이 된다”
 저는 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요. 그래서 메모하거나 사진을 찍어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작게는 일상에서 마주친 글자부터 크게는 제가 공부해온 영역들까지, 이 모든 경험들이 영감의 원천이에요. 특히 공부한 건 다 써먹고 싶어요.(웃음) 이렇다 보니 기획에 힘을 많이 쏟는 편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은 기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예요. 그런 면에서 디자이너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새로운 서체를 작업 중인데요. ‘납활자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디자인 전략을 짰습니다. 활자란 무엇이며 어떤 특징과 가치를 품고 있는가, 이른바 현대적이라는 건 어떻게 규정할 수 있고 어떤 이미지여야 하는가, ······. 정말 수많은 질문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면서 기획했어요. 서체를 완성하고 나면 『윤디자인 M』을 통해 제작기를 남겨보겠습니다.

 

문하나가 현재 작업 중인 서체의 견본 문자열

 

 

 #정조대왕의_어록을_아로새기며 

 

“주사불환일력부족 단환심력불체이(做事不患日力不足 但患心力不逮耳)

정조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일에 있어서,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내가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그것을 걱정하라.” ― 정조대왕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175권

 

 글자는 워낙 수가 많잖아요. 한글만 최소 2,350자에서 최대 11,172자, 그리고 그 외 영역들까지···. 작업하다가 가끔은 ‘수정하지 말고 그냥 진행할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악마의 속삭임입니다.(웃음) 그럴 때마다 정조 이산의 위 말씀을 아로새깁니다. ‘이게 최선이니?’ 하며 채찍질을 해요. 그리고 ‘수정할 수 있을 때 수정하는 건 다행이야’라는 마음으로 다시 차근차근 수정에 들어갑니다. 계속 이 마음의 반복이에요.

 

“고지식한 편, 그래서 가끔은 나를 풀어주는 편”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죠, 스스로 자유로워지도록 풀어주는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제가 좀 고지식한 편이거든요. 스스로에게 단호합니다. 채찍질도 자주 하고요. 때로는 제 자신에게 미안해질 정도랄까요. 그래서 가끔은 저를 풀어줍니다. 혼자 여행을 떠나거나 드라이브를 하고, 날 좋을 때 걸으면서 캔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마음의 근육을 풀어주려고 해요. 평소에 틈나는 대로 여행을 다녔는데 코로나 탓에 한동안 주춤했어요. 이제 다시 여행을 마구마구 다녀볼 작정입니다. 벌써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놓았지요.

 

 

폰트 디자인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트이는 것 같아요. 
시야가 글자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글자의 다양한 활용 방식, 
글자로써 개척될 수 있는 틈새시장 등등을 주시하게 됩니다. 
배울 게 많고 응용할 거리도 많은 이 직업!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평생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두근두근합니다
.


― 폰트 디자이너 문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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