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여덟 번째 인터뷰이
폰트 디자이너 김근영 “윤디자인그룹은 ‘관리자’ 역량까지 기를 수 있는 곳”
#공대출신_미대생 #폰트디자인은_데스티니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폰트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
저는 공대 출신 미대생이에요. 폰트 디자인이 정말 정말 하고 싶어서 미대로 편입한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글 디자이너라는 꿈을 품고 부모님께 미대를 가겠다고 했는데,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어요. 아마도 많이 들어보셨던 대사일 텐데, “예체능은 돈이 많이 든다.. 디자인은 재능 없이는 힘들다..” 같은. 뭔지 아시죠? 🤣
아무튼 그렇게 수능 점수 맞춰서 공대에 들어갔어요. 이과생이었거든요. 그냥저냥 적응하면서 다니는데 폰트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다시 샘솟더라고요? 그래서 다니던 곳을 중퇴하고, 쥐어본 적도 없는 붓을 잡고 물감을 만지며 미대 입성! 이건 여담인데, 입사하고 보니 TDC 사원 중에 저랑 같은 미대를 나온 분이 있더라고요. 데스티니···!
“어느 날, 한글 디자이너라는 낯선 직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제가 해야 할 일 같았어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한글 디자이너 이용제’라는 제목이 적힌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한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어요. 그 기사를 보자마자 ‘우와, 이 세상에 한글 디자이너란 직업도 있었어?’ 생각함과 동시에 ‘나도 하고 싶다! 나 왠지 잘할 것 같은데?’라고 느꼈어요. 그냥 정말 심장이 반응했어요. 운명 같았달까요. 훗···.
그 기저에는 초중고 시절에 종이만 있으면 글씨체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던 제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요. 글자를 이 모양으로도 써보고, 저 모양으로도 써보고, 무의식적으로 글자를 그렸던 학생 근영이. 아무래도 제 몸에 폰트 DNA가 있었나 봐요. 하하.
“공기 반 글자 반 세상, 그 세상을 만들어 가는 폰트 디자인”
폰트 디자인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작업이라 좋아요. 우리는 수많은 글자와 함께 살아가잖아요.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유튜브나 TV 예능 프로그램 등 각종 콘텐츠의 자막을 보고, 책을 읽고, 길을 걸으며 간판을 보고, 운전하면서 표지판과 내비게이션을 보고, ······. 공기 반 글자 반인 세상.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하게 늘 곁에 있는 글자들.
폰트 디자인은 사람들의 무탈한 글자 생활을 책임지고 있어요.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책이나 뉴스처럼 정보 전달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환경에서 글자의 생김새가 눈에 거슬리면 안 되겠죠. 그리고 폰트는 사람들의 감정에도 다가가곤 해요. 진지한 상황에서 쓰는 ‘나 지금 궁서체다’ 드립(애드리브)만 생각해봐도 아시겠죠?
“폰트 디자인이 다른 디자인과 다른 점”
디자인의 한계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폰트 디자인은 다른 디자인 분야와는 조금 다르게 어느 정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글자의 조형성 측면에서요. 한글이 가지고 있는 공간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리고 글자들이 모여 문장을 이룰 때 가독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디자인 측면에서 포기해야 한 부분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냥 딱 포기할 수만도 없습니다. 그러면 기존 폰트들과 차별화를 주기가 힘드니까요. 이런 선택의 기로에 수시로 서게 된다는 것이 폰트 디자인의 어려움이자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닛의_세계 #모든것이_글자로_보여요
“시간의 밀도가 글자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폰트 디자인은 시간을 들일수록 완성도가 올라간다고 생각해요. 글자는 미세하게 1유닛(Unit)*이라도 달라지면 완성도가 달라지거든요. 그만큼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라, 시간을 더 투자할수록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곤 했어요. 한 글자 안에서 최대한 많은 시도를 해보고 최적의 디자인을 찾아야 해요. 그래야 다른 글자로 넘어갈 수 있고요.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연구하고 들인 시간만큼 퀄리티 좋은 폰트 한 벌이 나오는 것 같아요.
* 유닛: 글자사이를 조절하기 위한 단위. (···) 보통 전각을 1,000개로 나눈 유닛 시스템을 사용한다. 글자사이는 유닛을 빼거나 더하면서 조절하는데, 예를 들어 -50 유닛은 글자사이가 기준값보다 글자크기의 50/1,000 만큼 좁아졌음을 뜻한다.
― 『타이포그래피 사전』(안그라픽스) 376~377쪽에서 발췌
“개인 작업 지속하는 이유? 나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개인 작업은 계속하고 있어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하루 종일 글자만 만들다가 퇴근해는데 또 글자를 만들 생각이 잘 안 들기는 해요. 그리고 업무 중에 각종 프로젝트의 시안 작업이나, 자사 서체 작업 자체에서 이미 개인 작업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개인 작업의 필요성을 잘 못 느낀달까요.
그래도 불현듯 한 번씩 ‘삘’이 올 때가 있어요. 개인 작업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잖아요? 정해진 기간도 없고, 디자인 ‘컨펌’ 안 받아도 되고요. 무엇보다 저는 저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찾아 나가고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이라도 작업을 합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다 영감”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서 영감을 받아요. 갑자기 책상에 놓여 있던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와서, 포스트잇 콘셉트로 글자를 그린 적이 있는데요. 정사각형 포스트잇처럼 꽉 찬 네모꼴 글자였습니다. 마침 그 포스트잇이 새것이어서 두툼했거든요. 그래서 글자 두께를 두껍게 그렸습니다.
또 언젠가는 치즈를 먹다가, 치즈처럼 늘어나는 듯한 글자를 그리기도 했네요.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보다가는 눈사람 캐릭터 ‘올라프’를 닮은 글자를 그려도 보고요. 떡볶이를 먹다가 떡볶이 콘셉트로 글자를 그린다면 어떨까 궁리한 적도 있네요. 친한 친구를 한 명 정해서 그 친구랑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이름 레터링을 해보기도 했고요.
요즘 그리고 있는 글자는 나무늘보 콘셉트예요. 얼마 전에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다시 봤거든요. 나무늘보 캐릭터 ‘플래시’처럼 느릿느릿하고 나무에 축 매달려 있는 듯한 모양을 표현해볼 거예요. 기대해주세요. 🦥
#모든_폰트디자이너들은_프로젝트매니저 #윤디자인그룹_인재상
“폰트 디자이너이자 PM으로서 배우는 것”
제 이름을 건 개인 폰트를 만들고 싶은 꿈은 있지만 당장의 목표는 아니에요. 윤디자인그룹 소속 디자이너로서 폰트 디자인 외에도 배우고 있는 게 많거든요. 단지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주도적으로 일하는 경험이 무척 소중해요. 일정 관리, 작업자 관리,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기획 등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키를 잡고 일하면서 많은 걸 배웁니다. 실무자 겸 관리자로서 능력을 키워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 폰트에 대한 욕심보다 이렇게 내실이 쌓여 가는 시간이 더 중요한 것 같네요.
“입사 후 첫 프로젝트였던 [한컴 훈민정음 가로쓰기체]”
입사하자마자 맡았던 첫 프로젝트가 한글과컴퓨터의 [한컴 훈민정음 가로쓰기체](2021)였어요.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세로쓰기용 서체를 현대적 사용성에 맞추어 가로쓰기용으로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가 담긴 세로쓰기체의 아이덴티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현대적 미감을 담아내는 게 관건이었죠.
세로쓰기용 글자를 가로쓰기로 눕히려면 글줄과 글자의 공간을 조정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 과정에서 세로쓰기체의 특징(훈민정음 창제 원리)을 최대한 유지해야 하니 많은 연구와 테스트가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진도가 안 나가서 애를 먹었지만, 점점 훈민정음의 매력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비읍[ㅂ]의 1:2 속공간 비율과 이응[ㅇ]의 정원 형태, 점의 크기, 그리고 점과 획 사이의 분리된 공간과 획의 질감 등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깊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정사각형 틀 안의 기하학적 조형감을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진지하게 말해보는 윤디자인그룹 인재상”
회식 좋아할 상! 🤣 저희는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잘 노는 사람들입니다.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만큼 회식에도 진심이에요. 그때그때 회식마다 콘셉트와 드레스코드도 설정하거든요.(회식 진행 담당자 최고!)
그 외에도 ‘웃상’, ‘성실상’, ‘다정상’, ‘폰트 좋아할 상’ 등등 인재상이 다채롭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짜로 윤디자인그룹에서는 직원 각자의 ‘나 자신’이 곧 인재상이에요.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으로 똘똘 뭉친 곳이랍니다. 참고로 저는 ‘쿼카상’을 맡고 있어요. 쿼카(Quokka, 캥거루과에 속하는 작은 동물)를 닮았거든요.
“
윤디자인그룹 소속 디자이너로서 폰트 디자인 외에도 배우는 게 많아요.
단지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주도적으로 일하는 경험이 무척 소중합니다.
일정 관리, 작업자 관리,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기획 등
프로젝트 전반에 대한 키를 잡고 일하면서 많은 걸 배웁니다.
실무자 겸 관리자로서 능력을 키워 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
― 폰트 디자이너 김근영 ―
● ● ● [글자-마음 보기집]은 계속 이어집니다: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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