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9.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4 유니버설디자인 폰트 [KoddiUD 온고딕] 만든 디자이너 박현준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네 번째 인터뷰이

유니버설디자인 폰트 [KoddiUD 온고딕] 만든 디자이너 박현준

 

 

 #물 #샤워중독 #인턴고딕 

 

“저는 물속에서 파워를 얻습니다(?)”

  저는 물을 좋아합니다. 저한테 샤워는 씻는 행위 그 이상입니다. 보통 30분에서 1시간가량을 샤워에 할애합니다. 제가 파워를 얻는 시간이랄까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하는 일도 샤워, 중요한 날을 앞두고 반드시 하는 일도 샤워. 샤워를 거르는 일이란 제게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라도 절대적이죠. 머리가 복잡할 때는 수영을 합니다. 생각을 정리할 때든 생각을 비울 때든 저는 수영을 합니다. 기본적으로 수중에 있어야만 ‘나다움’을 되찾는 성질이 제 몸에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따로 있는데요. ···이불 속입니다.

 

“인턴 시절에 무려 본문용 고딕 [인턴고딕]을 만들었습니다”

  윤디자인그룹에 인턴으로 입사하면 ‘인턴 과제’라는 걸 해야 하는데요. 자유 주제로 기획과 콘셉트를 잡고 자기 글자를 만드는 거예요. 제 인턴 과제 결과물은 [인턴고딕]이라는 본문용 고딕체였습니다. 차장님과 과장님, 동료와 선배 모두 쉽지 않을 거라는 반응들이었어요. 그래도 하지 말라고는 안 했습니다.(웃음) 

 

  본문체를 만들 때는 공간 분배, 굵기, 조형감, 곡선 등 요소들을 정말 세밀하게 작업해야 하거든요. 작업의 디테일도 스케일도 상당해요. 그래서 신입 사원이 맡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원래 본문용 고딕체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요. 물론··· 예상대로(그리고 주변 분들의 우려대로) 엄청 힘들었습니다.(웃음) 그만큼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글자의 기초 뼈대를 다지고, 그 뼈대에 어떤 옷(스타일)이든 입힐 수 있다는 게 마치 인턴 사원의 모습 같더라고요. 지금 [인턴고딕]을 다시 보면 괜히 흐뭇하다가도 ‘내가 왜 이렇게 작업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많이 쑥스러워요.

 

입사 후 인턴 과제로 만들어본 본문용 고딕체 [인턴고딕]

 

 

 #KoddiUD온고딕 #유니버설디자인 #유니버설폰트 

 

“저시력 상황을 간접 체험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만들어간 [KoddiUD 온고딕]”

  [KoddiUD 온고딕] 서체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에요. 2021년 4월 20일 ‘제41회 장애인의 날’ 기념으로 한국장애인개발원(Korea Disabled people’s Development Institute, KODDI) 사이트에서 최초 공개 및 무료 배포된 서체입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유니버설디자인환경부’와 윤디자인그룹이 공동 개발했고,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실무자였던 저에게는 여러모로 뜻깊었던 작업입니다.

 

  [KoddiUD 온고딕]은 시각 장애인, 저시력 사용자를 위한 유니버설 폰트를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는데요. 기존 전용서체 작업과는 방향성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글자의 콘셉트나 스타일 같은 비주얼 요소를 잘 표현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력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용자를 위하는 디자인, 즉 유니버설 디자인이 주된 과제였죠. 프로젝트 기간 동안 관련 연구도 병행됐었고요.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판독성·가독성과 함께 심미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시력 약자를 위한 폰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분들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프로젝트 초반에 많이 헤맸습니다. 그래서 저희 실무진이 다 같이 서울디자인지원센터 4층에 있는 ‘서울특별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를 방문했어요. 여기서 특수 안경을 착용하여 백내장, 망막색소변증 등을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간접 체험으로나마 시력 약자들의 폰트 이용 환경을 이해해보고 싶었어요. 서체를 만드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시안을 인쇄해서 센터로 가져가, 특수 안경을 쓴 상태로 판독성·가독성 테스트를 했어요. 서체 배포 후에는 일반 사용자들에게 판독 및 오독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기도 했고요.

 

  이런 과정 속에서 저 자신도 모르게 폰트 디자이너로서나 일반 시민으로서나 시야와 생각의 폭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요. [KoddiUD 온고딕] 프로젝트는 저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준 고맙고 유의미한 작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2021년 제41회 장애인의 날 기념 폰트 [KoddiUD 온고딕]
왼쪽: [KoddiUD 온고딕] 소개문 | 오른쪽: 레귤러 굵기 한글 2,350자 견본
서울특별시 유니버설디자인센터에서 저시력 환경을 간접 체험하며 [KoddiUD 온고딕] 시안을 테스트하는 모습
[KoddiUD 온고딕]이 적용된 포스터: 국립극장 무장애 공연 〈소리극 옥이〉, 2021

[KoddiUD 온고딕] 개발 후기 보기

 

 

 #헬베티카 #내가생각하는_좋은폰트 #또_물 

 

“[헬베티카]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나···”

  이상하게 저는 [헬베티카(Helvetica)]로 조판된 디자인을 보고 있으면 원인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사전적 의미가 ‘정화’와 ‘배설’이라는데, 제가 [헬베티카]에 대해 갖는 정서가 딱 그렇습니다. 뭔가, 몸안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 여러 매체에서 여러 디자이너들이 언급했던 표현처럼 공간감·균형감·곡선감의 완성도, 특히 군더더기 없는 인상 때문인 것 같아요. [헬베티카]의 무색무취한 중립적 인상이 일면 평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제 눈에는 이게 궁극의 경지처럼 다가오더라고요. 폰트 디자이너로서 꼭 다다르고 싶은 어떤 미지의 세계랄까요.

 

“좋은 폰트란 ‘많이 쓰인/팔린 폰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폰트란··· 말하기 조금 조심스럽지만 ‘많이 팔린 폰트’ 혹은 ‘많이 쓰인 폰트’예요. 저도 폰트 디자인을 시작하고 폰트를 만들면서 항상 해왔던 고민이에요. ‘콘셉트가 명확한 폰트가 좋은 폰트인가?’, ‘퀄리티가 높은 폰트가 좋은 폰트인가?’ 물론 다 ‘예스’라고 답할 수 있겠죠. 하지만 폰트도 어쨌든 상품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까 결국 대중의 선택과 판단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물 얘기를 하게 됩니다만) 저는 ‘물’에 비유를 많이 하는데요. 밥 지을 때, 찌개 끓일 때, 물 대신 녹차나 탄산수나 콜라를 넣는 사람은 없잖아요? 밥이라는 작업물을 만들 때, 커피라는 작업물을 만들 때, 다른 음료들보다 물이 더 적합한 ‘재료’이기 때문이죠. 어떤 종류나 상황에도 잘 녹아들고 제 역할을 다하여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물’ 같은 폰트. 이런 폰트가 좋은 폰트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말을 해놓고 보니, 제가 이래서 [헬베티카]를 좋아하네요?(웃음)

 

 

Neue Helvetica Paneuropean Basic 3Volume | 출처: FONCO

 

 

 #폰트디자이너는_마라토너다 #마라톤_하기_좋은_윤디자인그룹의_작업환경 

 

“게임 폰트를 개발할 땐 업무 시간에 게임을 해봅니다”

  아시다시피 전용서체 개발에서 중요한 게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이죠. 각 브랜드들의 특징마다, 프로젝트의 성격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 방법은 조금씩 달라요. 하지만 해당 브랜드의 홈페이지나 영상물, 각종 작업물들을 먼저 꼼꼼히 리서치해보는 건 필수입니다. 필요에 따라 학문적인 연구와 스터디를 할 때도 있고, 관계자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해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브랜드 아이덴티티 키워드 또는 이미지를 도출해내는 거죠. 약간 특이한 사례로는 게임 폰트 개발을 꼽을 수 있겠네요. 작업자가 업무 시간, 여가 시간을 막론하고 게임을 설치해서 직접 플레이해봐야 하거든요.(웃음)

 

“내부 직원이 보증(?)하는 윤디자인그룹의 작업 환경”

  통상적인 폰트 개발에 비해, 전용서체 개발 기한은 더 빠듯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어요. 왠지 클라이언트가 ‘빨리 작업해주세요’라고 요구할 것 같다는 거죠.(웃음) 이 부분은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신속히 파악하고 우리의 제안을 정확히 전달하는 소통의 기술에 따라 협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폰트 개발 작업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1년 이상 걸려요. 기본적으로 할당되어야 하는 물리적 시간이 제법 긴 편입니다. 단거리 경주보다는 마라톤에 가깝죠. 폰트 디자이너는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예요. 선수 양성에 필요한 데이터라든지 훈련 방식 같은 게 마라톤/마라토너 쪽에 맞춰져 있다고 봐야죠.

 

  제가 봤을 때 윤디자인그룹은 그런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폰트 업계에서 오랜 시간 축적된 데이터와 노하우가 존재하고, 작업 프로세스 또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습니다.(제가 입사 후에 가장 놀랐던 점이에요.) 레퍼런스 자료들도 방대하고, 소장 도서들도 많아요. 이런 작업 환경이 폰트 개발의 완성도와 능률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아마도 이 이유 때문에 클라이언트들이 계속 찾아주시지 않나 싶네요.

 

● ● ● [글자-마음 보기집]은 계속 이어집니다: 시리즈 보기

 

 

  1. 작성자 대표 이미지
    포스팅 잘 보고 공감누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