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30.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13 ‘폰트 제작 이후 활용성까지 내다보는’ 폰트 디자이너 이예형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폰트 디자이너 이예형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열세 번째 인터뷰이
‘폰트 제작 이후 활용성까지 내다보는’ 폰트 디자이너 이예형

 

 

#폰트라는_영감의도구를_만드는일

 

“참여형 디자인에 빠져 있었어요”

제가 폰트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사실 사람들이 개발된 폰트를 사용하는 모습에서였어요. 당시 저는 보이는 것만 예쁜 디자인이 아닌, 의미 있고 가치 있으며 특히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디자인에 목말라 있었거든요. 그때는 참 여러 가지로 순수하게 꿈꾸면서 디자인을 했던 것 같아요. 단순한 디자인 물을 만들 때도 작은 퍼포먼스를 넣기도 하고, 사용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포스터나 패키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거의 ‘참여형 디자인’을 주로 해왔었는데, 이런 작업은 특별한 가치를 만들어줘서 설거든요.

 

 

이예형의 학생 시절 작업물 자르는 포스터-리플릿(참여형 디자인)
이예형의 학생 시절 작업물: 자르는 포스터-리플릿(참여형 디자인)

 

 

“내가 만든 폰트를 사람들이 어떻게 쓸까?”

그러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려고 일러스트레이터를 켜서 폰트를 고르고 있을 때, ‘내가 만약 폰트를 개발하고 다른 누군가가 내 폰트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표현해 나갈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설레는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폰트 개발이 나에게나 여러 사람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폰트 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과학이 발전해야 공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처럼, 폰트가 발전해야 좋은 디자인도 많이 나오지 않을까요? 폰트는 사용자인 디자이너에게 영감이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영감을 실현하게 하는 도구도 될 수 있잖아요. 이런 엄청난 것을 만든다는 점이 폰트 개발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이러한 생각으로 어떤 상황에 어느 폰트를 쓰는지, 폰트 사용자의 직업별 선호 폰트를 분석하며 열심히 노력 중이에요.

 

“폰트 디자인을 할 때면 승부욕이 불타오릅니다”

제가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는 공부나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제 엉덩이가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집중했던 건 디자인밖에 없었거든요. 디자인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지금도 18시간을 풀로 집중하며 작업하는 저라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는 폰트 디자인을 할 때만큼은 승부욕이 불타올라요. 디자인 평가가 좋지 못하면 멋지다고 들을 때까지 불타올라 작업합니다. 때론 좌절하기도 하고, 열정을 쏟아부은 만큼 번아웃도 크게 오지만 금방 다시 동기 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번에 첫 PM을 맡게 되면서 진짜 너무 어렵고 남몰래 조금 운 적도 있었어요. 더 잘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 주기도 하고,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일정 관리나 여러 가지로 챙겨야 할 게 많아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그 많은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잘 버텨준 저에게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개인작업부터_신서체까지

 

“언젠간 레터링 글자로 폰트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회사에 다니면서 개인 작업을 매일 할 순 없기에, 소소하게 하고 있어요. 사실 레터링의 스케치 단계나 레퍼런스 조사 과정은 정말 많지만, 결과물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폰트는 레터링과 달리 가독성과 사용성 등을 생각하며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 작업에서는 레터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글자에 질감을 넣는 작업이 좋아서 많이 해보고 있는데요, 언젠간 레터링 글자들을 더 파생하여 폰트로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레터링도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저는 폰트 개발에 더 관심이 있거든요.

 

 

이예형의 개인 레터링 작업
이예형의 개인 레터링 작업

 

 

“즐거웠던 게임 레터링 스터디”

작년에 팀 내부에서 스터디 활동을 한 적이 있었어요. 윤디자인이 게임 전용서체를 많이 하는 편이어서 게임 시장에 대해 분석도 하고, 주제를 정해 그에 맞는 레터링 작업을 하는 것이었죠. 그중 오락실을 주제로 한 레터링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 중 가장 대표적인 ‘스트리트 파이터’를 한글화하여 레터링을 해보았어요. 스트리트 파이터는 여러 시리즈가 있는데, 이러한 시리즈 게임의 특징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가장 인기 있었던 ‘스트리트 파이터 2’ 형태를 기준으로 여러 시즌의 질감을 입혀 시리즈 게임임을 강조했어요. 시리즈 게임을 질감으로 나누어 표현한 게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이예형이 팀 내부 스터디 활동으로 작업한 스트리트 파이터 레터링
이예형이 팀 내부 스터디 활동으로 작업한 스트리트 파이터 레터링

 

 

덕분에 서체 시안을 잡을 때 이러한 스타일의 서체를 만드는 선택지도 늘어난 것 같아요. 그리고 오락실 게임이다 보니 스트리트 파이터도 픽셀로 된 게임이어서 레터링을 픽셀화해봤어요. 어린 시절 비트맵 폰트를 사용만 해봤지, 이렇게 만들어보는 건 입사하고 처음이어서 흥미로운 작업이었죠. 작업하는 내내 배운 것도 많고 즐거워서 나중에 한 번 더 게임 관련 레터링을 해보려고요.

 

 

이예형이 팀 내부 스터디 활동으로 작업한 스트리트 파이터 레터링의 픽셀화
이예형이 팀 내부 스터디 활동으로 작업한 스트리트 파이터 레터링의 픽셀화

 

 

“무려 20종의 픽셀 폰트, 4월 말에 폰코에 출시합니다”

작년 스터디 활동에 이어 픽셀 폰트를 기획하게 되어서 재밌게 작업했어요. 4월 말에 폰코(font.co.kr)에 출시될 예정인데, (깨알 홍보) 무려 20종이나 되니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요즘 Y2K 바람과 함께 예전에 쓰인 비트맵 폰트들이 많이 노출되고 있잖아요. 특히 게임이나 관련 이미지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사용층이 점점 단단해지면서 저희도 자연스럽게 준비하게 되었어요.

 

준비하면서 사실 걱정도 많이 했어요. 단순히 트렌드에 따라 잠시 유행하는 폰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시 지배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폰트의 활용성이나 상징성을 분석해보니, 비트맵 폰트 또한 폰트의 한 스타일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죠.

 

“신서체도 커밍쑨-”

그리고 다른 자사서체도 함께 개발하고 있어요. 작년부터 준비하긴 했지만,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어 아쉬운 마음인데요, 어서 빨리 이 친구를 만들어서 선보이고 싶습니다.

 

 

이예형이 현재 작업 중인 서체의 시안
이예형이 현재 작업 중인 서체의 시안

 

 

둥글둥글하고 볼륨감이 있어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의 서체에요. 또한 전체적으로 무척 귀엽죠. 그 귀여움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노력 중인데, 저에게 없는 귀여움을 담아야 해서 매우 어렵게 작업하고 있어요. 치즈가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느낌과 달달한 느낌이 나서 음식 관련 콘텐츠에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자주 보는 음식 유튜브에도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폰트를 제작할수록 이 녀석을 어디에서 사용하게 될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작업하고 있답니다.

 

 

#수학과_과학으로_빚어내는_폰트

 

“수학과 과학을 폰트 디자인에 쓰게 될 줄이야”

학창 시절에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어요. 그걸 지금 폰트 디자인에 이용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요. 폰트 제작은 수많은 규칙을 정하여 정리하고 조율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폰트를 만들 때 수학적, 과학적 지식을 많이 활용하는 것 같아요. 특히, 다른 문자와 달리 한글은 조합형 글자이기 때문에 여러 자소끼리의 연결성을 따지면서 계산하기도 하고, 회색도 정리할 때나 속공간을 분배할 때 저만의 규칙을 세워 수치 값을 정하거든요. 마치 식을 세우듯 획이 늘어날수록 수치 값을 분배해준다는 생각을 하며 제작하니 복잡할 때도 있지만, 왠지 모를 희열감도 생기더라고요. 물론 폰트는 사람이 사용하므로 시각 보정을 고려하며 제작해야 하지만요.

 

이 외에도 가로획 균형을 잡을 때 지렛대의 원리를 주로 활용하는데, 특히 ‘모, 몰, 뫄’ 같은 세로모임꼴이나 복합모임꼴의 가로획 균형을 잡을 때요. 이렇게 저에게 익숙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하니 이해도 더 잘 되고, 더 즐겁게 작업할 수 있어요.

 

 

#아무리_좋아도_필연적인_권태기_극복법

 

“고구마를 캐면 권태기가 사라집니다”

서체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권태기는 항상 오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디자인 작업과는 다르게 긴 여정을 걸어가야 비로소 결과물이 나오니까요.

 

제가 생각과 고민이 많은 편이라 그럴 때면 본가에 가곤 합니다. 본가 주위에 논밭과 산이 둘러싸여 있어서 머리의 근심이 사라지는 걸 느껴요. 그래서 일정이 빡빡하더라도 너무 힘들 때는 본가에서 에너지를 얻고 오죠. 그래도 극복을 못 한다면 부모님이 키우는 텃밭 일을 돕다 보면 제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재작년에는 고구마를 캐다 정신 차렸고, 작년에는 커다란 호박들을 옮기다가 정신 차리게 되었죠. (웃음) 권태기 같은 건 금방 잊고 본업이 가장 편하다는 걸 되새기며 다시 서울로 돌아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하게 됩니다.

 

“손톱에 힐링을 물들입니다”

권태기를 겪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도 있어요. 제 손톱에는 1년 365일 항상 봉숭아 물이 들여져 있는데, 이 작은 손톱 안에서 힐링을 얻기도 하고, 가끔은 부적으로 여기기도 해요. 주황색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네일아트보다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물이 빠지는 그 경계선을 바라보는 것이 좋더라고요. 또 본가가 시골 마을에 있어서 그런지 저는 자연 속에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집 앞에 봉숭아꽃이 있어서 물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우연히 폰트를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일을 하다가 힘들고 지칠 때 키보드 위에 있는 제 손톱을 바라보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하고, 물이 빠지는 걸 보면 감성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봉숭아 물이 빠지는 시기가 폰트 개발 기간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마감 시간을 알려주는 모래시계 같기도 해요. 그런데 너무 바쁘면 감성이고 뭐고 마감 시간이 더 늘어나길 바라며 손톱을 자르지 않기도 하지만요. (웃음)

 

 

#퇴근후에도_어쩔수없는_직업병

 

“폰트 디자이너에게 폰트 보는 건 일상이죠”

퇴근 후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게 대부분인 것 같아요.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직업병처럼 게임 속에서는 주로 어떤 폰트를 사용하는지, 영상에서는 어떤 폰트가 나오는지 본다는 거겠죠? 가끔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폰트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어요. 당시 시대에 맞게 의상이나 소품들을 고증하잖아요. 그것처럼 어떤 폰트를 사용하는지도 폰트 디자이너로서 생각하게 돼요.

 

또 저는 레퍼런스나 영감을 다양한 미디어나 플랫폼으로 수시로 찾아보곤 해요. 특히 핀터레스트를 진짜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예전에 학과 선배가 핀터레스트에 있는 디자인 물을 하루에 20개씩 매일 보다 보면 디자인 보는 눈이 트일 거라고 한 말에 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었어요.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면 핀터레스트를 본능적으로 확인한답니다. 특히 긴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유튜브 보기 전) 핀터레스트를 꼭 봐요. 물론 핀터레스트에서만 찾는 건 아니고, 다른 플랫폼도 많이 참고하죠.

 

물론 일과 전혀 상관없는 것도 즐깁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 시즌만 되면 일을 하더라도 라디오처럼 야구를 틀어 놓아요. 여유가 있는 날에는 한 장면 한 장면 챙겨보고 끝나면 하이라이트 영상도 찾아보곤 하죠. 시즌 중에는 하루의 마무리가 승리라면 그만큼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폰트는 사용자인 디자이너에게 영감이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영감을 실현하게 하는 도구도 될 수 있잖아요.
이런 엄청난 것을 만든다는 점이 폰트 개발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이러한 생각으로 어떤 상황에 어느 폰트를 쓰는지,
폰트 사용자의 직업별 선호 폰트를 분석하며 열심히 노력 중이에요.

― 폰트 디자이너 이예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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