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는 연재 콘텐츠 [TYPE÷](타입나누기)는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가 제작하여 새로 출시한 서체, 즉 타입(type)에 관해 나눈 타입 디자이너들의 스몰토크입니다. 서체를 만든 담당 디자이너의 영감과 제작 의도,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동료 디자이너들의 관점은 또 어떨지. 하나의 서체를 주제로 그 서체와 어울리는 공간에서 타입 디자이너들이 대화를 나누고 이를 기록하여 들려드립니다.
세 번째로 나눈 타입은 김근영 디자이너가 제작한 「은혜씨 글씨체」(🔗폰코에서 자세히 보러 가기)입니다. 많은 이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온 미술 작가이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영화 <니얼굴> 등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은혜씨의 손글씨 폰트 「은혜씨 글씨체」에 관해 다섯 명의 타입 디자이너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글. 이가희
사진. 이가희, 이정은, 이찬솔, 장연준
은혜씨 글씨체÷(김근영+이가희+이정은+이찬솔+장연준)
@슬런치 팩토리
서체와 어울리는 공간을 고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은혜씨 글씨체는 어디서 진행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뜨개질과 어울리는 공간을 근처에서 찾기 어려워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았고, 코지한 분위기의 인테리어와 곳곳에 책과 그림이 놓인 비건 레스토랑 슬런치를 선정했다.
가희 서체를 출시해서 기분이 뿌듯할 것 같아.
근영 원래 금융권 서체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은혜씨 글씨체와는 작업이 많이 다르니까 환기되는 것도 있고 즐거운 마음이 컸어.
정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데, 은혜 작가님의 손글씨가 폰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줘.
근영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가 한창 방영되고 있을 때, 글꼴연구소 임광규 소장님이 작가님 손글씨를 폰트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셨어. 작가님에 관한 기사를 쓴 기자님께 먼저 폰트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할 방법을 물어봤어. 그 기자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으로 수소문 끝에 겨우 작가님께 연락이 닿았지. 그 뒤에 양평에 있는 작업실에도 찾아갔는데, 그 미팅 때 함께 노래도 부를 정도로 분위기가 유쾌했고, 폰트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정말 좋아해 주셨대. 나는 당시에는 이 프로젝트 담당이 아니어서 같이 가진 못했어. 그렇게 킥오프 미팅을 한 다음, 원도를 요청해서 받고 그것을 토대로 폰트를 제작하게 됐지. 그 과정은 작가님의 유튜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사실 나는 당시 드라마도 안 봤고 작가님에 대해서 몰랐거든. 그래서 그냥 서체 디자이너가 된 후 처음으로 손글씨 폰트 작업을 해보는 거라 설레기만 했어.
정은 손글씨 폰트가 처음이라고 하니까 궁금한 게 있어. 나도 예전에 고암 전각체나 어반빈티지 같은 손글씨 폰트를 많이 했었거든. 작업 당시에 글자마다 질감을 표현하는 범위가 많이 다르니까, 질감을 어디까지 살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 은혜씨 글씨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질감 표현할 때 어땠어?
근영 맞아. 나도 어디까지 질감을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 다 표현하자니 작업 기간도 오래 걸리고 폰트의 용량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질감을 넣은 버전과 안 넣은 버전을 비교하는 작업을 초반에 많이 했어. 결론적으로는 작가님이 연필 작업을 많이 하시니까 질감을 넣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고, 폰코에 있는 공병각 연필 같은 다른 폰트에서 질감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많이 참고했어.
가희 글씨체 중에 가장 특징이 될 만한 자소는 어떤 걸까?
근영 ㅊ이랑 ㅎ의 꼭지야. 세로로 된 것도 있고 가로로 된 것도 있고 각도도 조금씩 달라. 작가님의 원도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가로로 통일해서 썼다가 최대한 원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섞여 있는 형태로 수정했어.
정은 그 부분이 재밌는 거 같아. 원도가 있는 서체들은 어디까지 살릴지 고민이 많은데, 폰트 작업이라는 게 규칙이 중요하니까, 어떤 규칙을 세워서 갈 것인가 생각이 많거든. 은혜씨는 ㅊ꼴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것도 있고 다양해서 좋았어.
찬솔 리거처(ligature, 조건에 따라 글자의 형태를 변화할 수 있는 기능)를 통해 사용자가 ㅊ이나 ㅎ의 형태를 선택해서 쓸 수 있게 했어도 재밌었겠다.
연준 본인이 생각하는 은혜씨 글씨체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해줘.
근영 일단 아까 말했던 것처럼 ㅊ에서 꼭지가 세로, 가로 섞여 있는 것과 글자의 크기가 되게 다양한 점이 특징이야. 조합으로 짜서 작업했는데 그래서 조합 개수가 엄청 많이 나왔어. 작가님의 글씨가 윗줄을 딱 맞춰서 하는 것도 있고, ㄱ을 좀 동그랗게 쓰거나 직선으로 딱딱하게 쓸 때도 있었는데, ㅊ과 마찬가지로 섞어서 표현했지.
가희 타입나누기 공식 질문. 가장 마음에 드는 글자는?
근영 꽃. 원도에서도 네모 칸에 맞춰서 그린 글자랑 문장으로 쓰신 글자가 다른데, 문장으로 쓴 글자를 더 많이 참고했어. 아무래도 우리가 글을 쓸 때는 네모 칸에 맞춰서 쓰지 않으니까 원래 손글씨의 느낌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게 문장으로 쓴 글씨 같아서.
정은 원도 이외에도 작가님의 글씨들을 기존의 작품이나 책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참고한 게 있어?
근영 워낙 원도를 또박또박 잘 써주셔서 거기까지 찾아볼 생각은 못 했던 것 같아.
찬솔 처음엔 작가님을 몰랐다고 했는데, 작업하면서 작가님을 알게 됐잖아. 연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점이나 작가님에 대한 생각을 말해줘.
근영 몸과 마음이 건강하신 것 같고 자존감이 되게 높다고 느꼈어.
정은 작가님은 그림을 그리신 후 그 아래에다가 글씨를 눌러서 천천히 정성스럽게 쓰시는데 그 느낌이 폰트에 되게 잘 나타난 것 같아.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느낌이 아주 잘 담아졌다는 생각이 들어.
근영 고마워. 은혜씨 글씨체는 크기와 형태는 자유롭지만 속도감은 천천히 느껴지게, 두 가지 반대되는 성향이 함께 느껴지도록 노력했어.
찬솔 폰트가 어디에 쓰이면 좋겠어?
근영 나는 시집에 쓰이면 좋겠어. 동시 같은 거.
정은 작업 기간은 얼마나 걸렸어?
근영 순 작업 기간은 4주 정도 걸렸는데, 파생 작업 앞뒤로 질감 잡고 검수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어. 굵기랑 글줄도 정해야 하고 질감도 어느 정도 할지 정해야 하니까. 거의 4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
정은 요즘은 네이버 클로바 같은 AI 기술이 손글씨 폰트를 만들어주는 시대가 됐잖아. AI가 만든 폰트와 전문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서 나온 폰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 AI가 이것까진 못 따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
근영 질감 표현은 아직 전문 디자이너가 우세할 거로 생각해. 지금까지 나온 AI 폰트 중에는 은혜씨 글씨체만큼 질감을 살린 폰트는 못 본 것 같거든. 너무 규칙적인 폰트들이 많은 것 같아.
찬솔 만약에 작가님과 함께 여행을 한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
근영 제주도에 가야 할 것 같아. 제주에서 작가님과 서로 얼굴 그려주기. 아니면 은혜씨 글씨체로 가랜드를 만들어서 그거 들고 같이 사진도 찍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도 갔으니까 멍게도 먹어줘야지.
근영 굿즈로 마스킹 테이프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니얼굴>이나 <우리들의 블루스>의 명대사가 들어가도 좋을 것 같고 서체랑 어울리는 글귀도 좋을 것 같아.
가희 나는 얼굴을 그리는 작업을 하시니까 거울을 해도 좋을 것 같아. 우드의 따뜻한 분위기에 뒷면에 좋은 단어나 글귀가 레이저 각인되어 있어도 예쁠 것 같아. 작가님 그림을 보면 새 같은 도장이 찍혀 있잖아. 그런 게 나중에 딩벳으로 추가될 계획이 있어?
근영 안 그래도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긴 했었어. 새 말고 좀 더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나무, 꽃, 구름이나 날씨 기호 같은 게 더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아. 그 부분은 작가님과 논의를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아.
정은 작가님 전시도 많이 하시니까 서체를 같이 전시해도 좋겠어. 리플릿에 폰트를 활용해도 좋을 것 같고, 포토월도 있으면 좋겠다.
연준 작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뭐야?
근영 크기가 다양하다 보니 자간에 대한 테스트가 엄청 힘들었어. 가변인데 자간의 규칙이 정해져 있진 않고, 거의 다 다르게 작업했기 때문에 조판했을 때 짜임새 있는 게 특징이거든. 근데 그만큼 작업하면서 힘들었어. 그리고 이건 TMI지만 작업하는 중간에 디스크 때문에 작업을 거의 2주 정도 못 했거든. 누워있으면서도 작업이 걱정되긴 했지.
가희 본인의 손글씨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있어?
근영 없는 것 같아. 내 글씨체가 내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랑 좀 다르거든. 나는 명랑하고 동글동글한데, 내 글씨는 되게 길쭉하고 전체적으로 나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정은 폰코 디자이너 소개에 ‘글자 그만 좋아하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라고 했잖아.
근영 이건 예전에 디자이너 인터뷰할 때도 했던 말인데, 내가 서체 디자이너를 왜 하고 싶었냐 하면 어릴 때부터 글씨를 여러 모양으로 써보는 걸 진짜 좋아했거든. (러브장, 교환일기 이런 거 기억하려나?) 그러다가 고3 때 우연히 기사에서 ‘한글 디자이너’에 대한 인터뷰를 봤어. ‘이런 직업도 있구나’라고 생각해서 그 뒤로 계속 하고 싶어 했지.
가희 은혜씨 글씨체의 패밀리를 확장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근영 도구를 다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연필 이외에 펜이나 다른 필기구로 쓴 글씨체 모음.
가희 마지막 질문인데, 다음으로 구상하고 있는 서체에 관해 살짝 언급해준다면?
근영 두께감 있는 제목용 패밀리를 계획하고 있어. 가을 정도에 출시할 예정인데, 내부에서도 빨리 출시되기를 많이 기대하고 있지. (기대 안 하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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