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 모호한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 경계를 넘어왔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로의 공공표지나 간판의 글꼴을 통해 자신이 다른 나라의 어느 도시에 들어와 있음을 이내 알게 됩니다.”
서울대 권영걸 교수의 이야기처럼 우리나라도 도시마다 서체가 있어 도시와 도시를 구분해주는 하나의 울타리가 된다면, 해외 관광객들이 국내 여행을 와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한국은 이들만의 문자를 사랑하는 나라구나. 자신만의 문화를 아끼고 계승해내는 나라구나.’라는 인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영업사원의 고상한 상상, 오늘은 도시별 서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창원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서울서체
“뭐야? 서울서체 아냐?”
제 고향은 자전거의 도시 창원입니다. 대학 시절 하굣길에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갔는데 유동인구가 많아 늘 지저분하던 정류장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문득 제 눈에 들어온 건 버스정류장의 안내 글꼴이었습니다. 안내판에 버젓이 쓰인 서체는 다름 아닌 ‘서울 남산체’.
창원시에서 창원 서체를 쓰지 않고 서울 서체를 쓰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던 날입니다. 물론 서울 서체가 아름다워 옥외광고물이나 현수막, 영상 등에 적용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창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저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은 서울 나름의 정체성이 있고, 창원은 창원 나름의 정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감성을 담은 서울 서체가 창원의 공공 사인물에 적용되어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했답니다.
서울 톨게이트 서울 서체 적용 전 [위], 후 [아래] / 출처: 구글
몇 해가 지나 대학 졸업 후 처음 서울을 마주했을 때, 저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답게 톨게이트에서부터 서울 서체를 잘 활용했던 겁니다. 그때 서체를 통해 느낀 도시 서울은 내가 평생 나고 자란 도시보다 몇 년은 앞서고 있다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서울과 어우러진 서울 서체가 주는 인상을 보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독특한 문화(Culture Content)가 있는데, 그것 바로 출처와 개발 시기가 분명한 한글이라는 점이죠. 많은 어려움 속에서 창제되고, 지켜져 온 문자인 ‘한글’을 문화화(Content Development)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도시별 서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도시별 전용서체 사례보기
우리나라에는 서울 서체 외에도 폰트로 개발된 도시별 서체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도시 상징물(CI)이 정비되며 서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도시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국내 서체 개발 현황
1. 서울 서체
서울서체 이미지 / 출처: 윤디자인연구소, 서울특별시청
서울시는 일찌감치 2007~8년부터 디자인 서울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비전과 추진전략을 세우고, 디자인의 핵심과 기본이 되는 서울 상징, 서울 색, 서울 서체를 개발했습니다. 뉴욕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I LOVE NY’ 슬로건이나 노란 택시와 같이, ‘서울’ 하면 떠올리는 브랜드 경험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거죠.
오랫동안 고유한 글꼴을 갖지 못했던 서울시는 서울시의 시각 질서를 바로잡는 서울 서체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체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어 사업자, 디자이너,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애용하고 있습니다.
2. 제주서체
제주서체 /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뽑힐 만큼 천혜의 자연유산과 관광지를 보유하고 있는 제주도는 그 상징성과 문화적 고유성을 살리고, 국제관광지로서 도민 및 국내외 관광객의 인식 속에 “배려하고 함께한다”는 시각적 친근감을 줄 수 있는 것을 중점을 두어 개발했답니다. 또한, 공공디자인의 인프라를 조성하는 데 의의를 두고 도시 특산품, 포스터, 시설 안내 사인물, 웹 페이지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도록 사용성을 높였습니다.
3. 순천체
순천체 / 출처: 윤디자인연구소 홈페이지
순천시 전용 서체는 ‘대한민국 생태도시’ 순천의 친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표현하였습니다. 읽기 쉽고 친숙한 서체로 제작되어 순천의 자연생태, 문화 유적지 등의 사인에 적용했습니다.
4. 예산군, 추사 사랑체
추사사랑체 / 출처: 윤디자인연구소 홈페이지
추사 사랑체는 충남 예산군이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체를 토대로 제작한 전용 서체로, 추사 문화상품 및 지역 농식품의 이미지 제고, 관광산업사업의 진흥은 물론 관련 홍보매체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어 지역 문화사업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도시 서체 / 출처: 김제시, 부산광역시, 전라북도
어느 날 갑자기 우후죽순 유행처럼 생겨나는 도시 서체 개발이 아닌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공공디자인의 발전을 위해 도시의 감성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 미려하고, 수준 높은 조형미를 갖추어 국민들에게 잘 읽히는 서체를 개발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글을 아름답게 가꾸는 문화가 꽃피우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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