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5.

건축 회사는 왜 글자를 지었을까?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이야기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이하 정림건축)와 윤디자인그룹이 공동 개발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가 선을 보였습니다. 국내 최초 ‘건축 설계 도면에 최적화된 서체’라는 점 외에도 [정림서체 김정철 서체]만이 갖는 가치가 있는데요. 바로 ‘건축 회사가 기획한 서체’라는 사실입니다. 건축 회사가 건물이 아닌 글자를 지으려 한 이유,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글. 윤디자인그룹 미디어콘텐츠팀 임재훈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

 

 

 글자 짓는 건축설계사무소: 1985년 캐드 도면 도입과 한글 서체 도안 

 

정림건축은 1985년 국내 건축설계사무소 최초로 컴퓨터 지원 설계 방식, 즉 캐드(CAD, Computer-Aided Design)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말 그대로 건축 설계를 컴퓨터로(캐드 소프트웨어로) 하는 것이죠. 당시 캐드 시스템은 라틴 알파벳만 지원을 했었는데요. 대한민국 건축가들이 그리는 건축설계도면에 영어만 쓰일 리 없죠. 그래서 정림건축의 건축가들은 한글 서체를 그래픽으로 도안해서 사용했다고 해요. 캐드 도면의 단선(polyline, pline)용 글자 1,700자와 복선(multiline)용 글자 1,400자를 직접 그려서 도면을 작성한 것이죠.

 

1967년 정림건축을 세운 건축가 김정철 | 사진 제공: 정림건축

 

이러한 혁신의 주체는 정림건축 창업주인 건축가 김정철 선생이었습니다. 1985년 캐드 도면 도입, 그리고 한글 서체 도안에 관한 이야기는 건축비평가 박정현이 쓴 「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이라는 글에 제법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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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조직화 추구는 1980년대 중반 캐드 시스템 도입으로도 이어진다. 1985년 미국에서 시그마3(캐드 시스템)를 국내에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건축 설계사무소에 직원을 파견해 견문을 넓히고 자료를 얻는 방식으로 세계 건축계의 동향을 주시해 온 정림건축은 1985년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시스템을 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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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캐드는 프레젠테이션용 투시도 제작 등에 활용되었다. 간단한 선 드로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컴퓨터가 그려낸 투시도는 건축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실제 효용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캐드의 한글화 과정이다. 작업의 능률을 위해서는 메뉴의 한글화가 필요했고, 캐드로 작성한 도면을 현장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글을 입력, 출력할 수 있어야 했다. 워드프로세스 글과 한글 타자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한메타자교실이 1989년에야 출시되었음을 감안하면, 컴퓨터에서 한글을 입출력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림건축은 한글 완성형 글자 전체를 캐드로 그려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한국형 표준디테일』(1979)이 일본 다이세이 건설과 협업한 플라자호텔 등을 통해 습득한 여러 디테일을 청사진으로 구워 펴낸 결과물이었다면, 『건축상세: 정림 디테일』(1990)은 디테일 도면 전산화의 결과였다.

 

― 건축비평가 박정현, 「김정철과 정림건축 1967–1987」, 건축신문, 2017.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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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시대를 앞서갔던 건축가 김정철의 혜안과 정신이 후대에게 또 다른 유산으로 재해석되고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림건축은 2020년 6월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습니다. 수많은 건축학도·디자인학도가 응모했고, 심사와 프레젠테이션에만 6개월 넘는 시간이 걸렸죠. 그렇게 대상 한 명, 최우수상 네 명, 입선 다섯 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윤디자인그룹은 심사 과정에서부터 참여하여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소개 영상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 대상 수상자 강유나 학생의 프레젠테이션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는 대상 수상자인 강유나 학생(경성대학교 건축학과, 학생부 고딕 부문 응모)의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에요. 최종 수상자(수상작) 선정 후, 윤디자인그룹이 서체 개발에 참여하면서 지금의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가 완성되어 갔습니다. 2021년 1월 개발 착수, 2022년 2월 명조·고딕 개발 완료, 6월 배포. 장장 1년 6개월간의 여정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현재 윤디자인그룹은 김정철 선생의 육필을 디지털 서체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자 프레젠테이션

  명시현(광운대학교 건축학과), 학생부 고딕 부문 보기

 ◼ 우현화(서원대학교 디자인학과), 학생부 명조 부문 보기

 ◼ 유시온(상명대학교 생활예술학과 가구 전공), 학생부 명조 부문 보기

 ◼ 정현아(한국예술종합학교 디자인과), 학생부 명조 부문 보기

 

 

현재 개발 중인 건축가 김정철 선생의 손글씨 서체 콘셉트 | 인터뷰: 윤디자인그룹 정유권 디자이너

 

 

 건축가·건축학도·일반인 모두를 위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건축가 김정철의 정신을 이어받아 작게는 건축계에, 넓게는 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후대들이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단계를 거쳐 무료 배포를 하고자 합니다.”(정림건축 관계자)

 

이렇듯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는 모든 사용자가 쓸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대한건축사협회·한국건축가협회와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활용을 위한 업무 협약을 진행하는 등 건축계 전반에서의 사용성 확장을 위한 노력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2022

총 6종(고딕·명조 각 3종, Light/Regular/Bold)

한글 유니코드(Unicode) 기반 11,172자, Basic Latin 94자, KS심볼 986자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한글 고딕

  여유로운 자간 CAD 도면에서처럼 작은 크기로 쓰일 때의 판독성·시인성 제고

  명조와의 통일성 일반 고딕 형태와 다르게 정원에 가까운 ‘ㅇ’ 자소로 탈네모 구조의 인상

  정림건축 아이덴티티 반영 3획 ‘ㅈ’ 쓰기 방식, ‘ㅊ’과 ‘ㅎ’에 세운꼭지 적용 등 건축도면의 선형(linear)을 형상화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라틴 알파벳 고딕

  열린 카운터 형태 작은 크기로 볼 때 혼동될 수 있는 글자 쌍(S/8, c/o 등)에 대한 판독성·시인성 제고

  직선 획 ‘R’, ‘K’의 다리를 직선 형태로 디자인하여 작은 크기에서 획이 일그러지거나 번져 보이는 현상 방지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한글 명조

  고딕과의 통일성 3획 ‘ㅈ’ 쓰기 방식, ‘ㅊ’과 ‘ㅎ’의 세운꼭지, 직선 획 등 고딕 서체와의 시각성 통일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라틴 알파벳 명조

  단단함과 현대미 공모전 서체의 ‘K’와 ‘R’ 곡선형 다리를 직선으로 보정하여 단단한 인상 강조 / ‘O’와 ‘Q’의 경우 정통적 명조 서체들의 기울기 축과 다르게 90°로 설정하여 현대미 부여

 

 

“초성·중성·종성이 만나 글자를 이루는 한글처럼, 서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문화의 소통 도구이자 문화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정림건축은 김정철 창립자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언어적 소통 도구로 재해석되고 설계되어 후대에게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자산으로 남겨지길 바랍니다.”(정림건축 관계자)

 

정림건축과 윤디자인그룹이 공동 개발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왜 건축설계사무소가, 왜 건축가들이 ‘글자’를 지으려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생략한다면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서체 개발에 참여한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노력 또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의 본뜻을 밝히는 데 역할을 다하였기를 바라봅니다.

 

 더 보기 

 ―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사이트 Award.Junglim.com/#fontdown

 ― 정림건축 사이트  Junglim.co.kr

 ― 정림건축 인스타그램 @junglim_architecture

 ― 정림건축문화재단 인스타그램 @junglim.foundation

 ―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 아카이브 영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