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1980~1990년대를 풍미했던, 또한 지금까지도 건재한 해외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 5인(영어권 국가에선 ‘iconic graphic designer’라 소개되는 분들!)의 근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칩 키드(Chip Kidd), 에릭 슈피커만(Erik Spiekermann),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phan Sagmeister), 폴라 셰어(Paula Scher), 그리고 데이빗 카슨(David Carson). 80~90년대에 디자인을 공부했거나, 그 시기부터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에겐 꽤나 묵직한 이름들일 것 같아요. 그만큼 우리나라에도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들이지요.
칩 키드, 에릭 슈피커만,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폴라 셰어, 데이빗 카슨. 이 5인에겐 공통점이 있어요. 대단히 강렬한 개성과 존재감으로 그래픽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샛말로 ‘센캐’에 속하는 분들이라 표현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정도로 선구자적 비전과 남다른 스타일로 자신들만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크리에이터들이죠. 그렇다면 이 다섯 분, 요즘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I am a print guy.”라고 말하는 2020년 6월의 칩 키드
저(윤디자인그룹의 일개 직원)에게 칩 키드의 연관 키워드는 ‘쥬라기 공원’과 ‘무라카미 하루키’예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 『쥬라기 공원』의 커버 디자인(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며 선보인 포스터 역시 칩 키드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활용했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1Q84』 3부작의 영어판 커버 디자인이 모두 칩 키드의 솜씨입니다. 저한테는 이 두 작업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Domestika’(https://www.domestika.org)라는 스페인의 크리에이터 양성 기관이 지난해 칩 키드를 인터뷰했습니다. 2020년 6월 25일자로 유튜브 채널에 영상이 업로드되었는데요. 인터뷰 초반 칩 키드의 멘트가 인상적입니다.
칩 키드 인터뷰(2020. 6. 25.) / https://youtu.be/2tCp1k0eQzE
“그래픽 디자이너 되기, 라는 게 말이죠, 요즘에는 보통 ‘적어도 일정 부분에선 디지털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거, 저는 1도 관심 없습니다. 인쇄 세대라서요. 마지막 인쇄 세대일 겁니다, 제가.”
(Nowadays, being a graphic designer usually means being at least in part a digital designer. That actually I have no interest whatsoever. I’m a print guy. I’ll be the last of the print guys.)
스스로 ‘디지털 시대에 맞는 그래픽 디자이너는 아님’이라고 딱 선언한 셈인데요. 어떻게 들으면 퍽 자조적인 말인데, 이상하게 칩 키드의 입에서 나오니 힙(!)하게 들립니다. 유튜브 영상에 영어 자막(자동 생성 자막이 아닌 업로더가 세팅한 자막)이 지원되거든요. 영어 공부도 할 겸 칩 키드 선생님의 ‘쿨내’를 느껴보시면 어떨까요. 저 또한 영어사전 뒤적이며 흥미롭게 이 인터뷰를 봤다는..
에릭 슈피커만의 활판인쇄소 ‘p98a’ 비대면 투어
스위스 모더니즘의 상징 ‘헬베티카(Helvetica)’를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헬베티카〉에서, 정말이지 독하게(!) 이 서체를 비판하시던 분. 2013년 어느 인터뷰에서 ‘최악의 클라이언트’로 대한민국의 모 기업을 꼽았던 그분.(이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준비한 링크 → https://bityl.co/5BWy) 바로 에릭 슈피커만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서체 디자이너 은퇴 후 독일 베를린에 ‘p98a’(https://www.p98a.com)라는 활판인쇄소를 세웠죠.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비정기적으로 p98a 투어 프로그램이 운영됐다고 하는데요. 해외 웹페이지들을 검색해 보면 p98a의 규모와 근사함에 대해 언급한 게시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직접 못 본 사람들은 그저 아쉬울 따름이죠. 그런데! 에릭 슈피커만 본인이 직접 p98a를 소개하는 영상이 지난해 여름 공개됐습니다. 일종의 비대면 투어인 셈이죠. 영상 촬영 시점은 2020년 5월, 업로드 시점은 그해 8월이네요.
자신이 세운 활판인쇄소 ‘p98a’를 소개하는 에릭 슈피커만(2020. 8. 25.) / https://youtu.be/ED_J6C9wchg
이 영상은 타입디렉터스클럽 공식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c/TypeDirectorsClub)에서 보실 수 있어요. 에릭 슈피커만은 TDC 운영위원이기도 했죠. 투어 영상의 러닝타임은 55분 52초인데요. p98a 구석구석을 에릭 슈피커만 선생님이 참 정성껏 소개해주시네요. 다치셨는지 목에 깁스를 하고 계신데, 지금은 다 나으셨겠죠?
illy 커피 ×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라!
일리(illy)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탈리아의 커피 브랜드입니다. 커피머신와 원두 말고도 다양한 커피 관련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있죠. 특히 ‘일리 아트 컬렉션(illy art collection)’은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컬래버레이션 상품으로 구성된 각종 컵 제품 라인입니다. 지난해 11월 일리 아트 컬렉션의 주인공이 바로 그래픽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였어요.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참여한 ‘일리 아트 컬렉션’ 페이지 캡처 / https://bityl.co/5BaW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일리 아트 컬렉션’ 영상 / https://youtu.be/Rd0E03fuBGQ
거두절미하고,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에디션으로 출시된 일리 에스프레소컵·카푸치노컵 세트란 정말이지, 예쁘기 그지없네요.(하ah..) 이 컬렉션의 론칭과 더불어 공개된 영상 또한 무척 스타일리시합니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주제가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조각들을 한데 모으기. 먼 미래의 일들을 그 모아진 조각들에 투영해보기.”
(To put the pieces together and to reflect on what happens in the long-term future)
저는 이 메시지를 이렇게 의역해봤습니다. “단편화돼 있는 현재의 시간들을 ‘조각 모음’ 해보라. 앞으로 당신게 일어날 일들이 보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열심히 살라, 라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어요. 그런 의미로···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컵에 커피 한 잔 마시면 안 될까요?
넷플릭스 다큐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에서 만나는 폴라 셰어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Abstract : The Art of Design)은 2017년 첫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예요. 2년 뒤인 2019년에 시즌2가 이어서 공개됐습니다. 세계 곳곳의 상징적인(iconic) 디자이너들을 만나, 그들의 철학과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인데요. 디자인‘계’ 분들뿐 아니라 일반 시청자들도 충분히 인스피레이션(!) 충만해질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강추!)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시즌1의 제6화에 폴라 셰어가 등장합니다. “언어에 비주얼을 입혀 세계 유명 브랜드와 유수의 조직을 표현해낸다. 글자와 낱말로 컬러풀한 세상을 디자인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폴라 셰르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라는 소개문이 호기심을 한껏 자극합니다.(넷플릭스의 인명 표기는 ‘폴라 셰르’네요.)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폴라 셰어 편(시즌1 제6화) 스틸컷 / 출처: imdb.com
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계정에 공개돼 있는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폴라 셰어 편 풀버전
(한글 자막도 지원되네요)
폴라 셰어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지도 제작자인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회상하는 장면인데요. 그녀는 “아버지는 예술이 한심하고 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죠”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지도를 만드는 것과 무언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정한 대상(장소)을 타인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구조화한다는 면에서요. 인포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국제 시상식 ‘말로피에 어워드(Malofiej Awards)’ 역시, 아르헨티나 출신의 지도 제작자 알레한드로 말로피에(Alejandro Malofiej)의 이름을 딴 것이기도 하죠.
‘요즘 디자이너들’을 향한 꽃노년 선생님의 훈화! 데이빗 카슨
1955년생이니 그래픽 디자이너 데이빗 카슨의 2021년 연세는 67세입니다. 오래전, 그러니까 1990년대 디자인 잡지들에 등장했던 데이빗 카슨의 모습은 가히 대단했습니다. 뭐랄까요, ‘미국 훈남’ 스타일이랄까, 아무튼 참 호방하게 잘생기겼다고 느꼈어요. 게다가 서핑까지 즐긴다고 하니, 더더욱 제 뇌리엔 ‘미국 훈남’으로 각인된 것 같습니다.
인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인, 건축, 인터랙티브 아트 부문의 크리에이터 양성 스튜디오 ‘stir’(https://www.stirworld.com)에서 2019년 10월 데이빗 카슨을 인터뷰했습니다. 여전히 훈훈한 미모를 간직하고 계시더군요. 이 정도면 ‘꽃노년’이라 불러드려야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비수처럼 날카롭네요. 인상적인 멘트를 한 번 옮겨와 보겠습니다.
데이빗 카슨 인터뷰(2019. 10. 15.) / https://youtu.be/Ony61D5Gk04
질문
“요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제발 좀 없어졌으면 좋겠는 것은?”
(A dominant thkinking amongst designers today you wish didn’t exist)
답변
“게을러지는 거, 디자이너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들―컬럼의 width값과 space값 조정, 문장들 간의 간격 조정 등등―을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설정된 디폴트(default)에 너무나 많이 맡겨버리는 거.”
(Getting lazy and let the computer make too many decision for them, and the software. Decisions that you should be making as a designer all the way down to widths of column, space between columns and space between sentences.)
아, 왠지 숙연해집니다.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고 말고요. 정신 차리겠습니다. 예, 아무렴요. 성실히 선생님 말씀 가슴에 아로새기겠습니다. 데이빗 카슨 선생님을 비롯하여 칩 키드, 에릭 슈피커만,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폴라 셰어, 그리고 우리에게 찬란한 영감을 남겨주신 모든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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