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6.

[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을로페셔널 4부. ‘미스터 나이스 가이: 챕터 1’



-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픽션입니다 -


모 대행사 Q팀장은 평소 친절과 배려의 사나이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본인도 이 평판을 은근 자랑스러워했지요. 남들이 좋아해주니, Q팀장의 매너 분비율은 다년간에 걸쳐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이제는 매너 과다 분비증이라도 앓는 듯, 막무가내로 충과 예를 다하려듭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계약이 종료된 프로젝트임에도, 신규 업체 선정 전까지만 같이 일해달라는 클라이언트의 간청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던 겁니다. 기어이 두 달을 추가 계약금 없이 일해준 그였지요. 모태 매너남이라고 그를 치켜세우던 사무실 동료들은 하나둘 Q팀장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태 매너남인 줄 알았는데, 좀 지켜보니까 모태 을이더라고요.” “뼈을이야 뼈을.” Q팀장과 함께 일한 팀원들의 혹평. Q팀장이 외근 나간 사이, 직원들은 그를 반찬 삼아 맛있는 점심을 들기도 했습니다. 


실로, 위기의 Q팀장입니다. 어느덧 자신의 유순함과 과도한 호의에 신물이 나버린 그. 퇴근길에 회사 근처 국수집에서 홀로 배를 채우다가 결국 소주 한 병으로 마음마저 채웠습니다. 그러고는 메신저 프로필 창에 ‘No More Mr. Nice Guy’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고 하지요. 



“미팅은 웬만하면 일 대 일로 하지 말고”


Q팀장이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준 사건이 최근에 벌어졌습니다. 사내 사보 제작 담당자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Q팀장이 잠시 공석을 메우게 되었지요. 전임자는 대단히 미안해 하며 한 가지 유의 사항을 귀띔했습니다. 


“지난달 홍보팀에 새로 들어온 A대리 있잖아. 에디터 말야. 뭐라더라, 시인지 소설인지로 등단까지 했다나? 자기 책은 아직 못 냈는데, 어쨌든간 주변에서는 다들 ‘작가님’으로 부르더라고. 작가인지 작자인지.. 걔 좀, 핸들링이 어려울 거야. 그냥, 좀, 그래. 미팅 한 번 해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미팅은 웬만하면 일 대 일로 하지 말고, 셋이나 넷 정도 그룹으로 묶으라고. 그래야 그나마 진행이 되더라. 뭐, Q는 알아서 잘 할 테니까..”


Q팀장은 인수인계 폴더를 꼼꼼히 확인하며 워크플로우를 짰습니다. 딱히 부담스러울 만큼의 업무량은 아니었습니다. 사보 제작은 처음이지만 그간의 대행 업무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지요. 무난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발행 계획일까지는 약 10주 남은 상황. ‘마감은 8주차에 끝내고, 9주차는 대표님 및 임원진 승인에 할애하면 되겠군.’ 


콘텐츠 기획안과 목차 구성까지 모두 마무리된 터라, Q팀장이 할 일은 필자들로부터 제때에 원고를 받아 편집팀에 넘겨주는 정도였습니다. 필진은 전부 3명으로, 외부 칼럼니스트 2인과 사내 필자 1인이었지요. 그 1인이 바로 전임자가 긴밀히 언급했던 A대리였습니다. ‘No More Mr. Nice Guy’ 슬로건의 본격화 전이었으므로, Q팀장은 A대리와 친분도 쌓고 말도 틀 겸 점심 약속을 잡았지요. “미팅은 웬만하면 일 대 일로 하지 말고”라던 전임자의 충고는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Q & A


함박스테이크집은 오늘따라 줄이 길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A가 2인석 예약을 걸어놓고 대기 중이었지요. 오전 11시 팀장급 회의가 12시를 넘기는 바람에 Q는 A보다 15분쯤 늦었습니다. 


“A대리, 미안 미안, 팀장 회의가 좀 길어졌네. 배들도 안 고프나, 어찌나 말들이 많던지. 하하!"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 전원을 눌러 시간을 확인하며) “팀장님, 예약 안 해놓으셨더라고요? 제가 했어요.” 


A는 웃음이 박한 사내라고 Q는 느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Q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12시 25분이 되어도 여전히 자리는 나지 않은 채였습니다. 둘 이상이 모였을 때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을 천성적으로 못 견디는 Q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매너 분비샘이 열린 것입니다. 


“어떻게, 좀 우리 회사 분위기엔 적응을 했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사수까지 나가버리고. 놀랐겠다, 자기.”(말 끝에 상대를 ‘자기’라고 부르는 건 Q의 습관입니다.)

“아, 자리 났네요. 들어가시죠.” 


이 지점에서 우리의 Q팀장은 자기 내면의 미세한 심경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는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팀장이 말하는데 대꾸도 안 해?), 모멸감(나는 이렇게 웃으면서 너를 대하는데.. 왜 너는..), 걱정(저렇게까지 무반응인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의아함(내가 ‘팀장’인 걸 모르나?), ∙∙∙. Q의 감정은 미묘해졌습니다. 



아이스라테 & 페퍼민트티


A는 머쉬룸 크림 파스타를, Q는 오리지널 함박스테이크 정식을 주문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은 “팀장님 쪽에 냅킨 있으면 좀 주실래요?”와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뿐이었습니다. Q팀장은 자신이 단 한 마디도 안 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제법 만족스러웠습니다. 매너 분비샘의 무절제한 개폐를 가까스로 저지했다는 안도감도 있었지요.  


“아직 마감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 그래도 미리 써놓는 게 편하지 않겠어?” 


Q팀장으로서는 꽤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지위(팀장이자 이번 사보 제작의 총괄자)를 확인시키고, 마감에 차질을 빚지 말라는 은근한 압력까지 더했다는 점에서, 그는 내심 흡족했습니다. 


“안 그래도 사보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요. 지금 잠깐 괜찮으시면 근처 카페에서 미팅 어떠세요?” 


A는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습니다. Q는 조금 당황했지만 표정을 감추고 “오케이!” 했습니다. 점심을 늦게 먹은 터라 현재 시각은 어느덧 1시 30분이었지요. (여전히) 사려 깊은 Q팀장은 모바일 메신저로 팀원들에게 A대리와 회의 후 들어가겠다고 알렸습니다. 대화창엔 팀원 모두 ‘읽음’으로 표시됐으나 답은 없었습니다. Q는 마음이 쓰였지만 지금은 A에게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사진 출처: Flickr



카페 안에는 보사노바 풍의 음악이 낮은 볼륨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A는 손에 든 아이스라테 테이크아웃 잔을 반복적으로 흔들거리다가, 자기 손에 들린 게 음료임을 문득 기억해내듯 이따금 빨대에 입을 댔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흔들흔들. 마라카스라도 연주하는 모양새로, A는 보사노바 리듬에 맞춰 잔 안의 얼음들을 부딪혔습니다. 카멜색 루즈핏 블레이저를 양 어깨에 걸친, 높은 코에 호피무늬 볼드프레임 안경을 쓴 장발의 A는 흡사 음지의 뮤지션이거나 골방의 글쟁이스러운 이미지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음료를 갖다주던 여성 종업원이 A를 슬쩍 쳐다봤던 걸 Q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보사노바 풍의 트랙이 끝나고 국내 걸그룹의 곡이 나오자 A는 슬며시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냅킨으로 닦아내면서 그는 독백하듯 한마디를 뱉었습니다. 


“기획안이 참, 뭐랄까, 적절한 형용사를 찾기가 어려운데 말이죠, 아무튼 좀, 그냥, 좀 그렇더라고요.” 


Q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며 (여전히 냅킨으로 자기 손을 닦고 있는) A를 응시했습니다. 


“글이라는 게요, 그렇게 막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 막 나오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물기가 완전히 사라진 A의 흰 손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습니다. 냅킨을 쥐고 있던 다른 한 손도 곧장 따라 올라왔습니다. 깍지로 포개진 A의 두 손이 테이블의 중간 지점을 넘어 Q쪽으로 다가왔습니다. Q는 거북했으나 표내지 않았습니다. 


“막 나왔다? 내가 보기엔 무난히 잘 나온 것 같던데? ‘자기’ 사수가 그렇게 일 막 하는 사람은 아니야.” 

“뭐, 외부 필자들 꼭지는 어차피 고정이니까 그냥 넘어가겠는데요, 제 부분이 너무 좀, 그냥 그렇더라고요.”

“적절한 형용사를 못 찾았다는 ‘자기’가 선택한 대안적 표현란 게, 고작 ‘그냥 그렇다’인 거야?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한번 설명해보지 그래.”



사진 출처: Flickr



A의 깍지가 풀어지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습니다. Q는 짐짓 무심한 태도로 머그잔에 담긴 페퍼민트티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A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는 동안 티백은 적당이 우러나 있었습니다. 상대의 테이크아웃 잔이 놓인 테이블 표면엔 물기가 흥건했습니다. A의 양손은 냅킨을 집는 대신 이번엔 팔짱을 꼈습니다. 


“글이라는 게요 팀장님, 말입니다, 그렇게 순순히 구체성을 띄는 게 아닌 건 아시지 않나요? 일테면 이상의 시는 어떻게 설명하시려고요? 모호성으로부터 파생되는, 그러니까, 쉽게 설명드리면 독자 개개인의 정서와 화학작용을 일으킬 만한 어떤 코어, 핵심, 그런 걸 숨긴 게 바로 글이에요. 내면화 작용을 통해서 최초의 모호성은 점차 개인의 내면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는 거죠. 안 그런가요?” 


말을 마친 A는 새 냅킨으로 테이크아웃 잔 주변을 닦아냈습니다. A는 빨대를 두어 번 휘젓고는 남아 있던 아이스라떼를 단번에 쪽 빨아 비웠습니다. 투명한 잔 안에 돌무덤처럼 쌓인 얼음들이 느리게 녹아가는 걸 Q는 얼마간 바라본 뒤 신중히 다음 말을 골랐습니다. 


“A대리.”

“네.” 

“우리 회사 사보는 ‘자기’ 개인 소설집이 아니야.” 

“물론 아니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회사라는 거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아내는 소설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스토리텔링’이란 걸 괜히 하는 게 아니니까요.”

“지금 기획안에는 A대리가 말하는 ‘스토리텔링’ 요소가 충분히 반영된 것 같은데?”

“그건 Q팀장님 개인의 의견이신가요? 아니면, 사보 제작 부서 전체의 입장인가요?”

“뭐?”

“곡해는 말고 들어주세요. 저 역시 제작팀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겁니다. 만약 부서 전체가 그리 생각한다면, 저로서는 그분들 모두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이번 사보 진행을 하기 어려워집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걸 팀장님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해요.”

“만약 나 혼자만의 의견이라면?” 

“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야겠죠.”


Q팀장은 이제야 A대리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확신했습니다. 그것은 분노였습니다. Q의 매너 분비샘은 완벽히 폐쇄돼 있었습니다. 좀체 땀을 흘리지 않는 냉체질처럼, A와 대면하는 동안에는 단 한 방울의 매너도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Q는 짐작했습니다. 카페 안에는, 두 사람이 처음 들어왔을 때 나오던 보사노바 트랙이 다시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라카스’가 텅 비었음을 재확인하며, A는 또 한 번 테이블 중간 지점 너머로 깍지 낀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Q의 상체가 의자 등받이 쪽으로 바짝 젖혀졌습니다. 


“리필, 하시겠어요?” 


머그잔을 내려다보던 A의 짙은 쌍꺼풀이 지긋이, 그리고 느긋하게 상대의 얼굴로 올라왔습니다. Q의 외겹 눈이 일순간 파르르 떨었습니다. 두 겹의 눈꺼풀은 미동도 없이 상대를 응시하고.. 주도권을 빼앗긴, 통제력을 잃은 Q팀장의 매너 분비샘이 결국 오작동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아, 리필? 여기 천 원 추가 비용이 있는데.. 내가 낼 테니까 리필하자고.” 


‘오, 이런..’ 그러나 이미 리필은 시작되었고.. 아이스라테와 페퍼민트티가 새로 채워져 나왔을 때즈음, Q는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느라 잔뜩 경직된 상태였지요. A대리는 리필된 ‘마라카스’를 빙그르르 돌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답니다. 그때 Q팀장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대표님이었습니다. 


“어이 Q, 지금 A대리랑 같이 있나? 잠깐 둘 다 내 방으로 올라오지.” 



을로페셔널 5부. ‘미스터 나이스 가이: 챕터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