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1.

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을로페셔널('乙'rofessional) 2부 - 산으로 가는 배를 멈출 수 없음에 관하여




▶ 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을로페셔널('乙'rofessional) 1부 - 코털(보러 가기)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픽션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학생 시절부터 남자는 이 말을 싫어했습니다. 이 말에 담긴 부정적 의미, 즉 사공이 많음에 대한 회의적 정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했죠. 그룹 단위 모의 소논문이나 조별 토의 준비 등 ‘함께’ 뭔가를 기획하고 진전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에서 종종 부침을 겪었던 탓입니다. 자기 할당량을 채우지 않거나, 자기 분량을 다른 조원에게 미루거나, 약속 시간에 늦거나 불참하여 일정에 차질을 빚는 조원들을 만나며 ‘사공’의 충원을 매번 갈급했었죠. 배가 산으로 가다니, 이건 혁신 아닌가! 그 많은 사공들이 힘껏 노 저으니 목적지에 순식간에 도착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물을 넘어 산까지 타버리는 것 아겠는가! 회사원이 된 뒤에도 남자는 이런 통탄을 이따금 되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남자는 이제 바뀌었습니다. 사공이 많아 가게 되는 바로 그 산이란, 녹음이 우거진 풍광 좋은 산이 아니라 끓는 용암으로 부글부글거리는 활화산임을 남자는 기어이 체험으로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녕 필요한 것은 적당한 사공들이 자기 포지션을 정확히 플레이 하는 팀워크임은 두말하면 입 냄새 나겠죠. 



사공은 자고로 적당해야 배가 잘 나간다

이미지 출처: Flickr



홍보 대행사 팀장으로서 남자는 이런저런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봤고 같이 일해봤습니다. 그들의 소속 기업(혹은 기관) 분위기나 개인 성향 등에 따라 업무 흐름은 천차만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스트레스야 받았지만, 퇴근이라는 리셋 버튼만 눌리고 나면 전부 초기화될 수 있을 정도였죠. 화와 짜증을 토해내고 싶은 순간에도 늘 천진히 웃으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화와 짜증을 내면 퇴근 후 반드시 후회하게 되리란 걸 후천적으로 깨우쳤으니까요. ‘이 화, 이 짜증은 퇴근과 동시에 포맷될 하루살이 같은 감정이나니···’ 마음으로 염불하듯 남자는 스스로를 다스렸습니다. 그런 감정 조절 능력에 퍽 자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남자와 남자의 팀원과 클라이언트가 동승한 배는 대체로 순조로이 계약 기간을 흘러갔습니다. 이 흐름대로라면 굳이 사공이 많을 필요도 없이 산이고 하늘이고 전부 올라갈 수 있겠거니 흡족해 했죠. 하지만 그때까지 남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을··· 한 프로젝트당 1명의 담당자(책임자)가 배정된, 실로 당연하고도 자연한 이 섭리와도 같은 체계 덕분이었음을··· 


남자가 새로이 맡은 프로젝트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12월 연말, 그 해 연차가 5일이나 남아 있었음에도 끝내 사용 못 한 채, 전 직원 휴무가 결정된 말일에도 정시 퇴근을 꽉 채울 수밖에 없었던, 기어이 “새해 목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혼자 욕하지 않는 것”이라는 굳은 각오를 하게 만든 바로 그 프로젝트에 관하여 말입니다. 




첫 단추는 잘 꿰었다. 그런데 단추가 너무 많다.


처음엔 순항이었습니다. 평일 야근은 물론이거니와 공휴일에도 사무실 책상에 붙박이로 끙끙대며 완성해낸 제안서가 경쟁 PT를 통과했습니다. 함께 붙박이로 공휴일을 보냈던 팀장도 기뻐해주었습니다. 도종환의 시였던가요.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라고 했던. 두 사람은 사무실에 새로 들여진 붙박이장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공휴일을 보냈습니다.(어린이날이었죠. “괜찮아요, 우리는 어른이잖아”가 아마도 그날 나눈 유일한 대화였을 겁니다.) 


입찰을 따내고 가진 첫 공식 미팅. 갑 쪽과 을 쪽 양측에 흐르는 기류는 대체로 온난했습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예예 그럼요, 전문가들이시니까 알아서 잘들 해주시겠죠 그렇죠?, 예예 당연하죠, 오늘은 그러면 식사나 같이 하시죠 샤브샤브 좋아들 하세요?, 예예 아이고 하하, ······. 담당자와 밝게 인사를 나누었고, 남자의 기억력이 물리적인 뇌 손상에 의해 엉키지 않은 이상 그 담당자는 분명히 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한 이 섭리, 한 프로젝트에 한 담당자. 이것이 개벽을 맞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첫 단추 잘 꿰기 전, 끝 단추가 몇 번째인지도 확인하면 더 좋겠다

이미지 출처: Flickr



샤브샤브와 “예예, 그럼요”가 융합되었던 화애의 그날이 지나고, 이튿날 오전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자가 계약 기간 동안 만들어야 하는 수두룩한 콘텐츠들은 5개의 상위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자, (샤브샤브도 먹었으니) 어디 한번 해볼까! 남자가 기합을 발휘하며 뜨거워지려던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 프로젝트의 담당자라고 했습니다. 남자는 이상했습니다. 어제 샤브샤브와 “예예, 그럼요”를 주고받았던 담당자는 분명히 여자였기 때문이죠.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의 말씨와 음성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흔적을 애써 억누른 표준 발음이었으나 오히려 그 억셈에 압도당한 상태로 힘겹고도 느릿하게 발성되어 듣는 이의 귀를 몹시 송구하게 만드는 어느 중년 남성의 것이었습니다. 납작한 치약 튜브를 대가리 끝까지 악력으로 밀어 짜낸 내용물처럼, 그의 목소리는 경청하기 버거웠고 만연체의 한 문장이 겨우 끝난 다음에는 알싸한 청량감까지 귀에 감돌았습니다. 그의 직책은 실장이었습니다. 또한, 이번 ○○ 프로젝트의 담당자라고 덧붙였습니다. 담당자가 바뀐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투실한 새 치약과 같은 넉넉함과 신뢰를 한껏 목소리에 담아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러니까, 요 프로젝트 자체가 좀, 뭐랄까, 이게 부서별로 담당자가 한 명씩 있거던요, 그래서 아마, 에, 우리, 성함이 어떻게 되시더라?, 아무튼, 우리 저, 팀장님께서 쪼끔 헷갈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래도 어떡해요, 계약은 이미 했는데, 잘 하셔야지, 그렇죠? 하하하···” 


어제의 미팅과 샤브샤브와 “예예, 그럼요”의 황홀경을 잊지 못한 채였던 남자는 사태 파악을 전혀 못 했습니다. 부서별로 담당자가 한 명씩 있다? 부서별로 계약 업체가 다르다는 뜻인가? 그런데 왜 내가 헷갈려야 하지? 나는 내 담당 프로젝트만 수행하면 되는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운집했지만,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번개가 친다든지 비가 내린다든지 구름이 걷힌다든지 하는 결론으로는 당최 모아지지 않았죠. 



ABC 초콜릿과 카톡 유감


“저희 첫 미팅 때 가셨던 거기 괜찮으셨죠? 내일 거기서 점심 같이 드시고 잠깐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담당자 A의 말입니다. 남자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첫 미팅 때 갔던 거기? 어디였더라··· 뭘 먹었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저희가 어디를 갔었죠, 라고 되묻는 건 좀 민망하죠. 남자는 알겠다고, 거기 좋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골똘히 기억 속을 뒤지다가 흠칫하며 떠올렸습니다. 샤.브.샤.브. 그래, 샤브샤브였어. 업무 시작 일주일 만에 남자는 첫 미팅 때의 황홀경을 말끔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헤아린 담당자는 A, B, C, D, E. 총 다섯 명. 다섯 가지 상위 카테고리별로 담당자 한 명씩이 배정된 셈이었고, 각각의 담당자들은 각기 다른 부서였으므로 남자가 응대해야 할 담당 실무자들은 실질적으로 한 카테고리당 두세 명이었습니다. 남자는 일하다 말고 안경을 벗은 채 두 손으로 두 눈을 비비고는 잠시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심경이 복잡할 때 하는 버릇이죠. ○○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 이 행위가 부쩍 잦아졌습니다. 혼미했습니다. 카테고리별 콘텐츠를 보내고 검수받아야 할 대상들이 이렇듯 많고 다른 건 처음 겪는 업무 방식이었거든요. 검수자들이 여럿인 만큼 수정 사항 또한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으로 요청되었습니다. 일기당천의 자질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남자는 무력한 졸병에 불과했습니다. 똘똘 뭉친 지휘관들을 일개 병사가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가해지는 업무 요청의 목소리들은 스테레오를 넘어선 5.1채널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균열하는 댐의 누수를 막는 일이 이와 같을까요. 한 부분을 막아놓으면, 바로 옆에서 새롭게 물이 새고, 부랴부랴 또 막으면 그전에 막았던 곳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 오후 서너 시쯤부터 중독적으로 까 먹는 ‘에이비씨 초코’를 끊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A, B, C, D, E, ··· 알파벳이 적힌 초콜릿을 손에 쥐고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검지와 엄지에 힘이 들어가는 상황에 남자는 몸을 떨었습니다. 키보드 캡 모양의 작은 사각형 초콜릿은 뭉개지고, 초콜릿 표면에 각인된 알파벳 역시 찌부러지며 남자의 손가락에 들러붙었습니다. 먹지 않고 부술 때 당이 보충되는 초콜릿이라니. 남자는 자기 감정에 어떤 결함이 생겼음을 깨닫고는 에이비씨 초코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기로 했던 것입니다. 



참 좋아했던 이것.. 

이미지 출처: G마켓



클라이언트 C는 카카오톡으로 업무 요청과 수정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낯선 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남자는 알림음만 듣고도 사지가 경직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클라이언트 C의 카톡 알림은 남자의 사생활을 서서히 마비시켜갔습니다. 알림음을 귀여운 아기 목소리로 바꾸면 부담감과 중압감이 좀 덜해지려나? 소심하나마 자기 보호 차원에서 그런 꾀를 부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기 목소리 = 클라이언트 C’라는 인식이 굳어져 남자는 아기마저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남자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몹시 싫어합니다.)파블로프의 피험체가 되어버린 자신을 서글퍼 하면서도 남자는 친절히 답을 보냈습니다. 답신의 마무리는 일관되게 ‘죄송합니다’이거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딱히 죄송한 것도 없고, 감사한 것도 없었습니다. 최대한 친절해 보여야 한다, 죄송하고 감사하자, 친절함의 덕목은 죄송과 감사다! 남자는 홍보 대행 업무를 통해 체득한 자신만의 지론에 서서히 질식해가는 중이었습니다. 




내부 분열, 그리고 고립무원


○○ 프로젝트 시작 두 달째가 지나가면서 남자는 서서히 익숙해졌습니다. 그 사이 담당자는 어느덧 H까지 늘어나 있었습니다.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피드백(대개는 수정 요청)에도 남자는 의연해졌죠. 카카오톡을 활용한 신개념 업무 요청 방식에 대한 위화감도 많이 사라졌습니다.(‘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무슨 근거로 카톡을 사적인 메신저라고 생각해왔던 걸까? 업무 메시지 보내면 뭐 어때서?’ 하는 자기 검열까지 남자의 내부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더욱 친절하고, 보다 많이 죄송하고 감사하는 대인대용의 태도를 지니게 되었죠. 한 마리 백조가 된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물갈퀴질을 해대는 작디작은 발에는 내내 담배가 들려 있었습니다. 흡사 수중 용접과도 같이 담뱃불은 물밑에서 줄곧 꺼지지 않은 채였습니다. 남자 백조는 발바닥으로 들이켠 담배 연기를 동력원 삼아 한껏 친절하고 죄송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매너남으로서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콘텐츠 하나 보내고 물을 먹을 때마다 담뱃불로 물먹은 체증을 지졌습니다. 


그러나 매너 좋은 백조가 담배로도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부의 갈등이었습니다. 다채널 피드백을 수용하고 나면 다음 수순은 내부 직원들과의 소통이었죠. 가장 괴로운 순간. 여러 담당자들로부터 떨어지는 반복적인 수정 사항들은 남자뿐만 아니라 남자와 함께 일하는 내부 직원들까지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수정, 수정의 수정, 수정의 수정의 수정, 수정의 수정의 수정의 수정, 수정의 수정의 수정의 수정의 수정, ······. 화가 났을 겁니다. 짜증이 났을 겁니다. 애써 웃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남자에게 가감 없이 정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저 미안했습니다. 사비를 들여 옹색한 간식거리를 사 오기도 했습니다. 간식거리가 옹색해서 다시 한 번 미안했습니다. 

간식을 담당자 A, B, C, D, E, F, G, H에게 사 드려야 했던 걸까요. 여전히 수정 요청은 폭발적이었고, 내부 직원들의 웃음 짓는 표정 한 구석엔 서늘한 여백이 드리워 있었고, 정색하는 직원은 정색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습니다. 그저 미안했던 처음의 마음이 점차 일그러져감을 남자는 감지했습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그랬습니다. 내부 직원들에 대한 서운함이 어느 틈에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절했던 백조는 미움 많은 흑조가 되어가는 중..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블랙 스완’



고립무원. 남자는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매 순간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어 분연했습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계.약.기.간. 이 네 글자, 이 불변의 진리를 믿는 신도로서 을이 취해햐 할 태도는 단 한 가지. 그저 계속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계속 자네가 을인 것일세, 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미안하다, 지금은 들어줄 수가 없단다, 남자는 아프게 외면했습니다. 백조의 새하얀 깃털에 담배 연기가 검게 찌들었습니다. 물갈퀴질은 더욱 거세졌고, 뻐끔뻐끔 연기를 뿜으며 백조는 증기 기관차라도 된 듯 전진해 갔습니다. 사공 많은 배들이 백조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습니다. 


2부 끝. 

3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