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19.

직장생활 인간관계 노동요 ‘갑의 독설, 을의 침묵’


클라이언트 잡(Client Job)에 종사하는 국내외 모든 직장인들, 

그러니까, 갑과 을 모두에게 바칩니다.


토미 리 존스, 수잔 서랜든 주연의 ‘의뢰인(The Client, 1994년 개봉)’이라는 영화가 있었더랬죠.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어요. 한 지방검사와 변호사가 마피아의 위협으로부터 의뢰인을 보호하여 법정에서 진실을 증언하도록 고군분투하는 줄거리. 이 영화를 통해 ‘클라이언트’라는 단어와 개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죠.


<영화 의뢰인 / 출처 : 네이버 영화>


약 20년이 지난 지금, 1994년의 꼬마는 클라이언트 잡 종사자로 자랐네요. 영화대로라면 제 의뢰인은 제가 반드시 지켜줘야 할 연.약.한.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의뢰인은 아주 강인한 존재였어요. 온몸이 갑옷처럼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인 갑각류와도 같은, 보통 사람보다 갑절로 견고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존재. 그렇습니다. 제 의뢰인은, 제 현실의 의뢰인은 갑(甲)이었던 겁니다.


을의 딜레마 ‘갑의 독설, 을의 침묵’


갑은 말하고, 을은 듣습니다. 때때로 갑은 독설하고, 을은 침묵합니다. 내면 깊숙이 침잠한 슬픔은결국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퇴적되고, 이 “죄송합니다”라는 퇴적층이 을의 존재의 무늬가 된답니다. 그래서 을은 갑 앞에선 언제까지나 죄.송.한.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을은 한때, 갑이 되기를 꿈꾼 적이 있어요. 자고 일어났더니 등이 딱딱한 갑충이 되어 있더라는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하루아침에 물렁한 을에서 단단한 갑으로 변신하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저버리고 동굴 밖으로 당당히 나왔듯, 싯다르타가 6년 고행을 중단하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갔듯, 일개 클라이언트 잡 종사자인 을은 갑이 되기를 포기하자 인간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갑의 딱딱한 갑각의 외골격 속에도, 을의 그것과 똑같은 말랑말랑한 인간의 살이 있을 거예요. 갑이 무어며, 을은 또 무어랍니까. 누가 우리를 이렇듯 갑과 을로 분별한 거죠? 당신의 이름이 갑이 아니고, 나의 이름이 을이 아닐진대, 우리는 언제까지나 갑과 을의 관계여야 하는 걸까요. 갑인 그대와 을인 나는, 그래서 ‘우리’는, 또한 그래서 ‘인간(人間)’임을 잊지 말기로 해요. 


모월 모일, 어느 을의 콩트(Conte)


▶아침 여섯 시 반


스마트폰 메일 앱의 알림음을 알람 삼아 일어남. 메일이 와 있음. 발신자는 ‘그분’. 광고인 박웅현은 광고주를 (광고)’주님’이라 부른다고도 함. 비몽사몽 잠결에 확인한 그분의 메일 내용은…



메일을 읽은 뒤, 컬러가 ‘가라앉는’ 느낌이란 도대체 어떤 느낌인 걸까 곰곰이 생각해봄. 폰트가 ‘딱딱’하다는 것, ‘경쾌’하고 ‘발랄’한 이미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함. 이 모든 것을 응축한 ‘쫌 더 라이트하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 듯. 나의 그분은, 언제나 이렇게 화두를 던져줌. (하아…) 아무래도 출근길에 좀 더 고민해야 할 듯.



아침 일곱 시 반


출근길 지하철 안. 죄스러운 마음으로 오늘 연차인 디자이너 OO씨에게 조심스레 카톡을 보냄. 일단 아침인사를 먼저 건넴. 그리고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전송 버튼을 누름. 



곧 후회함. 웃는 이모티콘은 넣지 말 걸... 모처럼의 연차라 편히 쉬시고 계실 텐데 작업 요청이라니. 얼마나 불쾌 하셨을까. 하지만 속 깊은 OO씨는 금세 답문을 보내주심



전생이 만약 있다면, OO씨는 분명 거친 사내들을 진두지휘 했던 여장군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며, 다시금 OO씨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잠시 지하철 좌석에 앉아 눈을 붙임. 


오전 열한 시 반


8시에 출근(정시 출근은 9시)하자마자 그분을 위해 온라인 모니터링(해당 클라이언트 기업 관련 뉴스를 매일 검색하여 보고하는 일)을 마치고, 마감이 늦은 외부 필자의 오전 발행 원고를 부랴부랴 리라이팅해 포스팅 하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아침인사 게시물을 올리고, 다음달 계약 연장 입찰에 대한 부서 회의까지 마친 뒤에야, OO씨가 신속히 보내준 디자인 수정안을 확인. 벌써 11시 30분. 그래도 아직 오전임. (휴…) 그분께 디자인 수정안을 메일로 전송함. 


오전 열한 시 삼십 삼분

전화 옴. 그분이다. 그것도 메일 보낸 지 3분 만에! 


“보내주신 거 봤는데요.. 음.. 이것보다 쫌 더 라이트한 느낌으로는 어렵나..?”


그분은 마음이 급해질 때, 꼭 마지막 어미를 반말로 끝맺음. 그분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다는 신호임. 


“아, 쫌 더 라이트 하게요?”


‘쫌 더 라이트한’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음. 그러나 대답해야 함.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그분의 요청을 되묻는 방법이 가장 좋음. OO씨에게 다시 카톡을 보내야 함. 오전까지만 해도 ‘평일 연차 짱 조으다 ^,^’ 라고 되어 있던 OO씨의 카톡 프로필 상태가 이제는 이렇게 바뀜. 


ㅡ_ㅡ


…아무래도, 오늘은 OO씨에게 무척 미안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


오후 세시


벌써 3시. 시간은 광속처럼 흐름. 다행히 이벤트 디자인 시안은 ‘쫌 더 라이트한 느낌’을 잘 살린 결과로, 그분의 컨펌(Confirm)을 받아 발행. 선착순 300명만 모으면 되는 댓글 달기 이벤트. 약 한 시간가량이 지났는데 고작 6명 참여. 하기야 ‘1,100원짜리 우유 기프티콘이 선물인데, 나 같아도 안 하겠다’라는 이단의 생각도 해보지만, 두렵기는 매한가지. 조마조마, 콩닥콩닥. 참여자가 안 모이면, 나의 그분은 화를 낼 것임. 


오후 다섯 시

오후 다섯 시 현재, 이벤트 참여자는 11명. 조마조마, 콩닥콩닥, 두근두근… 곧, 그분에게서 전화가 올 것임. 헐, 왔음.


“지금 블로그 보고 계시죠?”

“네. 이벤트 첫날이고, 시작한 지 몇 시간 안 됐으니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그러게 쫌 더 라이트하게 가자니깐”

“죄송합니다… 그래도 컨펌을 해주셔서 저희가 발행을 한 건데…”

“발행은 어쨌든 해야 하는 거니깐”

(을은 이 대목에서 침묵)


저녁 여섯 시 반


퇴근 시간. 이벤트 참여자는 20명. 내일 아침 출근했을 때는 300명 전원이 차 있기를 바라며, 이만 집으로 향함. 퇴근길 열차 안에서, 디자이너 OO씨에게 고맙고 미안했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냄.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을의 바람대로 이튿날 이벤트는 무사히 마감되었고, 그분은 네이트온 대화창으로 큼지막한 미소 이모티콘(^____^)을 띄워주셨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나자, 소심했던 을은 대범해졌으며, 그분의 “쫌 더 라이트한 느낌”을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다. 


갑의 독설은 점차 재테크나 연애 이야기로 바뀌어갔으며(갑은 미혼 남성이다.), 을의 침묵은 점차 호탕한 웃음소리로 바뀌어갔다(을은 연애 고수이다).



이 미천한 장시(長詩) 형식의 노동요(勞動謠)는, 기업 블로그 및 SNS 운영 대행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일개 회사원의 노래입니다. 클라이언트 잡의 본질이란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관계 맺기’일 것입니다. 의뢰 기업과 대행업체, 갑과 을이라는 피상적 구분 짓기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그대와 나, 나와 그대라는 인간적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 바로 클라이언트 잡이지요. 사회생활을 하는 모두는 갑임과 동시에 을의 처지일 겁니다. 그러니, 갑이든 을이든,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나아가듯, 갑에게서 을에게로, 을에게서 갑에게로 이심전심 진정한 소통의 성과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ps 1.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랭보의 ‘일루미나시옹’을 소심히 패러디 해보았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ps 2. 텍스트 이미지에 사용된 아름다운 서체는 ‘윤명조 135’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