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6.

'엉뚱상상' 영화 팬이 선정한 명품 포스터 20선


여러분에게 영화의 '첫인상'을 결정 짓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지, 감독은 누구인지, 누가 시나리오를 썼는지, 촬영감독이 누구인지, 장르가 무엇이지, 흥행 성적은 어떤지…. 아마 개인의 영화 취향에 따라 다를 텐데요, 제 경우에는 포스터가 그 영화의 관람 여부를 판가름하곤 합니다. 그야말로 '꽂히는' 포스터를 발견하면, 그 영화의 평점이나 리뷰야 어떻든 상관없이 무조건 봐버리거든요. 남녀 관계에선 얼굴만 믿고 만났다가는 재앙이 닥칠 수 있겠지만, 영화라면 비주얼(포스터)을 꽤 신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포스터(물론, '잘 만든' 포스터에 한정합니다.)는 해당 영화의 서사적 색채라든지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의 예술이죠. 시집의 표제시, 혹은 소설책의 제목과 커버 디자인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윤디자인 '엉뚱상상' 팀의 나름 영화 팬인 제가 선정한 명품 포스터 20선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포스터 한 편 한 편에 담긴 맛과 멋을 음미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스터 나열 순서는 한글 제목 오름차순으로서 작품성 순위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

굿바이(おくりびと, 오쿠리비토)

            감독: 타키타 요지로 / 출연: 모토키 마사히로, 히로스에 료코 / 2008년작 


이미지 출처: 야후 블로그


도쿄의 한 성공한 첼리스트가 자신이 소속된 오케스트라의 해체와 함께 한순간에 실직자가 되고, 고향으로 내려가 생계를 위해 납관사(納棺師)가 됩니다. 숨을 거둔 고인의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고, 장례를 주관하는 일을 하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는 삶과 죽음이 빚어내는 인생의 장중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집니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의 그러한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죠. 풀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남자. 그리고 그의 뒤로는 설산과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녹색의 풀, 죽음을 암시하는 얼어붙은 산, 이 모든 삶과 죽음을 품고 있는 하늘. 그 가운데에서 남자가 첼로를 연주합니다. 포스터를 보자마자 이 남자의 첼로 연주가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무작정 관람했던 기억이 나네요. 


[P.S] '오쿠리비토'는 우리말로 '보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는 제81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2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출연: 크리스챤 베일, 톰 하디, 앤 해서웨이 / 2012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는 분명 슈퍼히어로 무비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이토록 ‘다크’하면서도 ‘딥’한 영웅 캐릭터는 그 이전에는 분명히 없었고, 그 이후로는, 글쎄요,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얼마간은 쉽게 등장하지 못할 겁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그에 걸맞게 포스터부터 대단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데요, 처참히 깨진 모양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배트맨의 가면과 깊은 어둠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악당 베인의 뒷모습. 그리고 단 한 줄의 카피. ‘전설이 끝난다(The Legend Ends).’ 영웅 배트맨이 영화에서 맞닥뜨리게 될 절체절명의 위기와 악당 베인의 무자비한 면모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한 장의 포스터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웬만한 영화 한 편 못지않죠. 



[명품 포스터 20선] #3

데미지(Damage)

           감독: 루이 말 /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 / 1992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데미지>는 불륜 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작품인데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랑을 다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만, 사실 이 영화의 주제는 불륜이 아닙니다. '욕망' 앞에서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하찮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다소 자극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죠. 포스터에서 전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남녀. 시아버지인 제레미 아이언스와 며느리인 줄리엣 비노쉬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가리고 있는 포즈가 매우 강렬한데요, 금기된 욕망을 깨뜨렸지만, 차마 그 순간에 자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엿보이네요. 이미 다 벗고 있는 와중에 수치심을 느낀 두 남녀의 모순된 이미지가 인간 존재에 대한 감독의 냉소적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P.S] '데미지'는 2012년 11월에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는데요, 당시 포스터도 퍽 걸작입니다. 격렬한 정사를 나누던 두 남녀가 제레미 아이언스의 아들에게, 즉 줄리엣 비노쉬의 남편에게 발각되는 순간을 포스터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죠. 


<데미지> 리마스터링판,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명품 포스터 20선] #4

러스트 앤 본(Rust and Bone, De rouille et d'os)

           감독: 자크 오디아르 / 출연: 마리옹 꼬띠아르, 마티아르 쇼에나에츠 / 2012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러스트 앤 본>은 신체적 장애로 걷지 못하는 여자와 한 삼류인생 파이터의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포스터의 배경은 해변입니다. 상체를 드러낸 남녀가 맨살을 맞대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건장한 등에 업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몸은 바다에서 막 나온 듯 젖어 있고, 이들의 뒤로 서광 같은 햇살이 비치고 있습니다. 제목의 서체는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단단한 표면에 긁어 새긴 듯 거친 질감이 도드라집니다. De rouille et d'os. 프랑스어로 ‘녹(rouille)과 뼈(d'os)’라는 뜻입니다. 다시 보니 제목의 서체는 마치 뼛조각을 바위에 짓눌러 새긴 것과 같은 느낌도 납니다. 온갖 상처와 실패로 녹슬어버린 인생의 표면에 사랑이라는 뼛조각이 새겨 넣은 상징인 것일까요. 게다가 단어에 성별(性別)을 지닌 프랑스어에서는 ‘녹’이 여성명사 ‘뼈’가 남성명사라 하니 제목의 의미와 포스터의 헐벗은 남녀가 빚어내는 상징성이 매우 강렬하죠. 



[명품 포스터 20선] #5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감독: 앤드류 니콜 /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에단 호크 / 2005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한국인 아내를 두었기에 우리나라에선 '케서방'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니콜라스 케이지. 이런저런 구설수로 커리어가 곤두박질친 상황인데요, 지금은 B급 액션영화에나 출연하는 배우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한때 그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했던 연기파 배우였습니다. 좋은 작품들에도 많이 출연했죠. 그중 하나가 <로드 오브 워>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수록 적국에 온갖 최첨단 군수품을 팔아 때돈을 버는 미국인 무기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죠. 미국이 '세계평화'라는 대의명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동안, 그만큼 미국 내 군수산업은 호황을 맞는다는 아이러니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포스터 속 니콜라스 케이지의 초상은 다종다양한 탄피들로 형성돼 있는데, 이는 전쟁의 역사를 통해 성장한 미국의 자화상처럼 보입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6

로리타(Lolita)

           감독: 애드리안 라인 /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도미니크 스웨인 / 1997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로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중년의 남성이 10대 소녀에게서 성적 욕망을 느끼는 심리를 칭하는 말인데요, 러시아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 소설 <로리타>가 발표 당시 커다란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생겨난 용어입니다. 이 소설은 1962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의해 처음 영화화되었고, 1998년 애드리안 라인 감독을 통해 두 번째로 리메이크되었습니다. 특히 1998년작은 "로리타, 나의 로리타…."라고 되뇌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광적인 내면 연기가 가히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소녀를 미치도록 탐하지만, 결코 소유할 수는 없는 중년 남자의 도착적 고뇌와 관음증이 포스터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몸의 굴곡이 드러난 원피스 차림으로 엎드려 태연히 책을 읽는 소녀. 그 소녀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남자. 그리고 반복되는 타이틀. Lolita, Lolita, Lolita, Lolita, Lolita…. 


[P.S] 로리타 역을 맡았던 소녀 배우 도미니크 스웨인은 1980년생인데요. 어느새 이 소녀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하기야, 1948년생 제레미 아이언스는 한국 나이로 예순여섯 살이네요.



[명품 포스터 20선] #7

록키(Rocky)

           감독: 존 G. 아빌드센 / 출연: 실베스터 스탤론, 탈리아 샤이어 / 1976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실베스터 스탤론의 출세작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록키>입니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마치 자기 자신의 인생을 축약해놓은 듯한데요, 미국의 '헬스키친(Hell's Kitchen)'이라는 뒷골목에서 태어난 스탤론은 동물원 사자 우리 청소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노동자였습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배우의 꿈을 안은 채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하죠. 그가 영화사로부터 거절당한 횟수가 1,800회 이상이라고 하니 그 고초가 짐작되시죠? 그런 그가 마침내 인생의 '한방'을 날렸으니, 바로 1976년에 개봉한 <록키>입니다. 1946년생인 스탤론은 당시 서른 살이었죠. 영화 속 록키는 그야말로 삼류인생입니다. 권투에 재능이 있으나 일찌감치 포기하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고 있었죠. 그런 그를 다잡아준 존재가 아드리안입니다. 아드리안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록키는 다시 권투를 시작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승자가 되죠. 포스터는 록키와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잡고 있습니다. 복싱 트렁크를 걸친 록키의 손을 아드리안이 꼭 잡아주고 있죠. 어쩌면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것일 수도, 혹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중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두 사람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네요. 



[명품 포스터 20선] #8

링컨(Lincoln)

           감독: 스티븐 스빌버그 / 출연: 대니얼 데이 루이스, 토미 리 존스 / 2012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전기 영화 중에는 일단 완성도는 제쳐두고서라도 주연배우와 실존인물의 놀라운 싱크로율에 그저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바이오그래피를 다룬 최근 개봉작 <잡스(Jobs)>도 그런 부류에 속하죠.(작품성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몹시 비판적입니다만….) 2012년에 만들어진 영화 <링컨>의 티저 포스터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과연 스필버그라는 거장의 영화답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세련된 흑백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링컨의 수심 어린 옆모습. 실제 링컨의 초상을 CG로 되살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꼭 닮아 있었는데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극중 캐릭터와 완전히 동화되어 말 그대로 ‘실제’ 같은 모습을 자아내는 극사실주의 연기 기법)의 달인이라 평가받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그 주인공이니 오죽하겠습니까. 



[명품 포스터 20선] #9

박쥐(Thirst)

           감독: 박찬욱 / 출연: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김해숙 / 2009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박찬욱 감독은 서사와 이미지를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결합해내는 능력을 지닌 감독입니다. 스토리 텔러로서의 자질과 더불어 회화적인 감각까지 갖춘 연출가이기에 드라마를 비주얼로 표현하는 데 매우 능수능란한 연출가죠.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 진출작인 <스토커>를 내놓은 뒤 어느 국내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가장 만족하는 작품으로 <박쥐>를 꼽은 바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절제와 기도를 목숨처럼 여기던 신부가 어느 날 뱀파이어로 변하고, 그동안 억눌려 있던 욕망에 탐닉하다 스러져가는 내용인데요, 해외판 포스터가 실로 명품입니다. 온통 검은 배경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송강호와 마치 그의 음영인 듯 수직으로 대칭을 이룬 채 누워 있는 검은 드레스 차림의 김옥빈이 송강호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한 신부에게 드리워진 욕망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를 옥죄어가는 모습을 상징화한 것이죠. 심지어 <박쥐>의 영문 제목은 <Thirst(갈증)>입니다. 검은 바탕에 레드 컬러로 새겨진, 게다가 첫 자와 끝 자의 대문자 T를 십자가로 형상화한 제목이 소름 끼칠 만큼 선명하네요. 억압된 욕망에 대한 갈급은 뱀파이어나 인간이나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일 겁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0

배트맨 2(Batman Returns)

           감독: 팀 버튼 / 출연: 마이클 키튼, 미셸 파이퍼, 대니 드 비토 / 1992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앞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이어 또 박쥐 영화네요.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2>입니다. 주요 캐릭터인 배트맨(박쥐), 캣우먼(검은 고양이), 펭귄맨(펭귄)의 얼굴이 위 아래 차례대로 위치해 있습니다. 셋을 수직으로 함께 놓고 보니, 이건 마치 하나의 인격체 안에 세 동물이 깃들어 있는 듯한 형상이네요. 실제로 영화에서 이 세 인물의 캐릭터는 극명히 구분됩니다. 배트맨은 어떻게든 정의를 유지하려는 쪽인 중도선, 캣우먼은 부정부패 난무하는 남자들의 세상을 쓸어 없애버리자는 절대선, 펭귄맨은 자신의 세력(펭귄 군대)을 동원해 새로운 통치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절대악. 캣우먼과 펭귄맨의 극단적인 성향을 합쳐놓으면 배트맨이 될 수 있겠죠. <배트맨 2>에서 배트맨이 싸우는 상대는 사실 캣우먼이나 펭귄맨 같은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다중성과 끊임없이 맞서는 것이죠. 그래서 필연적으로 고독해질 수밖에요. 이런 음울함과 기기묘묘함이야말로 팀 버튼 영화의 매력일겁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1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2007년작, 감독: 폴 그린그래스, 출연: 맷 데이먼, 줄리아 스타일즈 등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다이하드>와 <리셀웨폰> 시리즈는 1990년대 아날로그 액션의 한 흐름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들입니다. 액션영화에도 만약 ‘사조’가 있다면 이 두 시리즈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죠. 2000년대 들어 그런 역할을 한 마스터피스가 나왔으니, 바로 <본> 3부작입니다. 등장인물의 동선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극단적인 핸드헬드, 극도로 과격한 카체이스씬, 리드미컬한 합과 파괴력이 조화를 이룬 맨손 격투씬 등 <본> 3부작이 펼쳐 보인 액션의 신세계는 실로 감격스러울 정도입니다. <본> 시리즈의 영향으로 이후의 많은 액션영화들이 비슷한 요소들을 탑재하게 되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007 시리즈인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입니다. 자, 다시 <본>으로 돌아오죠. 3부작의 피날레인 <본 얼티메이텀> 포스터를 보시겠습니다. 제이슨 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응시하는 곳은 뉴욕이죠. 그가 정체성(아이덴티티)을 잃어버린 장소이자, 군부대의 신체기능 강화 약물 투여로 지금의 ‘본’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연어가 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듯 제이슨 본에게 뉴욕은 일종의 회귀의 장소이죠. 그러고 보니 제이슨 본과 뉴욕 사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네요. 



[명품 포스터 20선] #12

사무라이 픽션(Samurai Fiction)

           감독: 나카노 히로유키 / 출연: 호테이 토모야스, 오가와 타마키 / 1998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답게 영화에서도 종종 만화적 상상력이 가되곤 합니다. 물론 이건 꽤나 모험이죠. 꼴보기도 싫은 작위적인 범작이 돼버리거나, 혹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거나. All or nothing. <사무라이 픽션>은 단언컨대 후자 쪽입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라는 가치는 퍽 엄숙한 분위기인데요, 감히 희화화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엄숙함의 층위가 수 세기 동안 다져져 왔다고 할까요. 아직까지도 사무라이와 무사도가 일본의 국민성인 양 대외적으로 포장되는 것이 그 예죠. <사무라이 픽션>의 훌륭함은 바로 그런 딱딱하게 굳은 전형성을 경쾌하게 깨부쉈다는 데에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사무라이들의 슬랩스틱 코미디, 대담한 분할 편집을 통한 만화적 장면 구성, 다이내믹한 음악, 과장되었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은 유머러스한 검투 장면 등. 포스터에서도 이 같은 혁신의 감각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레드와 블랙 컬러의 조합이 강렬한 이미지를 자아내는데요, 일본의 다다미방을 연상시키는 창살문을 뒤로 하고, 칼을 쥔 두 사무라이의 검은 실루엣이 대치됨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러면서도 가지런히 그어진 창살문의 촘촘한 프레임들이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당장이라도 사무라이의 칼이 그 프레임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여서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죠. 레드와 블랙, 안정과 긴장, 프레임과 사물. 이처럼 대조적인 요소들의 맞물림을 통해 한 편의 명작 포스터가 완성된 것입니다. <사무라이 픽션>의 이 유명한 이미지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킬 빌>에서 패러디하기도 했죠. 



[명품 포스터 20선] #13

40살까지 못해본 남자(The 40 Year-old Virgin)

           감독: 주드 아패토우 / 출연: 스티브 카렐, 세스 로건 / 2005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짐 캐리와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얼굴만 봐도 웃긴 남자’를 꼽는다면 단연 스티브 카렐일 겁니다. 짐 캐리가 다채로운 안면근육과 신체 활용을 통한 몸개그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스티브 카렐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다 갑작스레 돌변하는 예측불허의 포커페이스 개그 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는 스티브 카렐의 ‘두 얼굴’ 면모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코미디입니다. 제목의 의미는…. 다들 아시리라 예상합니다. 포스터를 보십시오. 액션피규어에 에나멜 칠하기가 유일한 취미인 40대 무경험 남성의 해맑은 얼굴입니다. 흡사 아동복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스트라이프 피케 셔츠, 곱게 빗어 고정시킨 7대 3 가르마, ‘착해 보인다’ 말고는 다른 형용사를 찾기 어려운 미소. 남자의 뒤로는 태양과 같은 붉고 노란 서광이 비치고 있습니다. 40대 무경험 남성이 마침내 성에 눈뜨게 되는 희열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볼수록 웃음 나는 포스터입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4

살인의 추억(The Memory of Murder)

           감독: 봉준호 / 출연: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변희봉, 김뢰하 / 2003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봉준호 감독에게 ‘봉테일(봉+detail)’이라는 애칭을 안겨주기도 한 수작 <살인의 추억>. 2003년에 개봉했으니 어느덧 10년이 되었네요.(하, 세월 참….) 여전히 미결인 채로 남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스릴러입니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등의 카피처럼 이 영화는 끈질기게 범인을 좇지만, 끊임없이 놓치고 마는 강력계 형사들의 절박함과 내적 갈등을 잘 보여줍니다. 포스터의 두 형사는 용의자의 사진을 들이밀며 정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관객들에게 “이 사진의 주인공이 진짜 범인 맞습니까?”라고 묻는 듯한, “제발 진범이라고 대답해줘요….”라고 애원하는 듯한 절절함이 전해지는데요,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올 듯 정면을 응시하는 두 배우의 얼굴, 그들 뒤로 트여 있는 공간감, 사진을 쥐고 있는 익명의 손 등이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

습니다. 자, 이리 들어와요. 여기 와서 사진을 좀 제대로 봐요. 범인이 맞아요? 이 새끼가 진범이냐고? 응? 대답 좀 해봐요. 한 장의 포스터가 발산하는 흡입의 마력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극장 티켓을 구매하게 된 관객들이 5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죠. 



[명품 포스터 20선] #15

시(Poetry)

           감독: 이창동 / 출연: 윤정희, 김희라, 안내상 / 2010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이창동 감독은 영화인이면서 문인이기도 합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죠.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보는’ 영화이기보다 ‘읽는’ 영화입니다.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이 그렇고, 이 영화 <시>도 그러합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팟캐스트 방송에서 <시>에 대해 ‘단편소설을 영화로 옮겨놓은 것 같다.’라는 단평을 남기기도 했죠. 포스터는 주연배우 윤정희의 얼굴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아닌 저 머나먼 세계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 “시는 ‘보는 것’이다.”라는 영화 속 대사를 상기해본다면, 어딘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야말로 곧 시 쓰기의 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포스터 사진은 경일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사진작가 구본창의 작품입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6

13층(The Thirteenth Floor)

           감독: 조세프 루스낵 / 출연: 크레이그 비에코, 빈센트 도노프리오 / 1999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1999년이라…. 걸작 <매트릭스>가 개봉한 해가 아닙니까.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왔던 이 세계가 사실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이 같은 허상을 떨쳐내어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의 작품. 불교적 세계관과 성경의 모티프, 플라톤 철학,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 등등을 영리하게 버무려낸 사이버 펑크 <매트릭스>. 이 영화와 같은 해에 개봉했다가 조용히 묻힌 또 한 편의 사이버 펑크 무비가 있었으니 제목 하여 <13층>. 일단 포스터를 보시겠습니다. 한 남자가 세계의 끝에 서 있습니다. 이어져오던 길도 끊기고 ‘자연적’ 배경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다만 세계의 끝에는 레이아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남자가 먹고 마시고 숨쉬고 잠들고 다시 깨어났던 세계는 컴퓨터가 창조해낸 가상현실 공간이었던 거죠. <매트릭스>와 본질적인 서사의 틀이 동일합니다. 포스터가 이미 너무 많은 비밀을 드러낸 탓일까요? 아니면 현란한 특수효과와 연출 기법, 멋진 스타급 배우들이 없어서였을까요? <13층>은 오래전 <이티>와 함께 개봉했던 SF 고전 <블레이드 러너>가 소리 소문 없이 개봉관에서 내려졌듯이 그렇게 잊혔습니다. 물론 <블레이드 러너>와 비견될 수는 없겠으나, 시간을 내어 관람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입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7

천국에서의 5분간(Five Munutes of Heaven)

           감독: 올리버 히르비겔 / 출연: 리암 니슨, 제임스 네스빗 / 2009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이 영화는 피해자와 피의자의 이야기입니다. 피해자가 피의자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는 내용이죠. 궁극적인 테마는 ‘용서’입니다. 포스터에 두 남자의 얼굴이 보입니다. 탁한 주황빛의 험상궂은 남자가 왼쪽, 백색의 선량한 눈매를 가진 또 다른 남자가 오른쪽입니다. 피의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실 수 있겠나요? 시각적으로만 받아들일 때, 관객 대부분의 경우 왼쪽의 남성이 피의자일 것으로 예상할 텐데요, 사실은 오른쪽의 리암 니슨이 피의자입니다. 청소년기에 살인을 저질렀지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성장해 지금은 자수성가했죠. 반면에 리암 니슨으로부터 가족을 잃은 왼쪽의 남자는 평생 복수심을 안고 살아왔고 생활형편 또한 변변치 못합니다.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선으로 보일 수 있음을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한 멋들어진 포스터입니다. 



[명품 포스터 20선] #18

칼(The Blade, 刀)

           감독: 서극 / 출연: 조문탁, 웅흔흔 / 1995년작


이미지 출처: HKmovieposter.blogspot.kr


1980년대와 1990년대 홍콩 영화를 회상할 때 ‘서극’이라는 이름은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제작자로 또한, 연출자로 명실상부 80~90년대 홍콩 영화계를 이끈 장본인이기 때문이죠. 오우삼 감독과 주윤발의 대표작인 <영웅본색> 시리즈를 제작한 인물이 바로 서극입니다. 연출작으로는 이연걸의 출세작 <황비홍>과 <동방불패>, 그리고 장만옥•임청하 주연의 <신용문객잔> 등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재미’란 ‘절대선’이다.”라는 지론답게, 그의 무협 영화들은 관객을 몰아의 경지로 이끄는 마력적인 재미가 있었습니다. 홍콩 영화계의 흥행사였던 그가 연출한 작품 가운데 <칼>이라는 영화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뚜렷한 스타 배우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죠. 주연배우는 조문탁인데, 그는 당시 신예 무술배우로서 선량하고 잘생긴 외모에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차세대 스타였죠. 이연걸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황비홍> 시리즈에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연걸만큼의 대중성을 갖춘 배우는 아니었죠. 이 낯선 배우가 <칼>에서 맡은 역할은 칼 제조장이라는 역시나 낯선 캐릭터입니다. 심지어 한쪽 팔을 잃은 인물이죠. 그다지 전형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캐릭터인 겁니다. 조문탁이라는 배우에 대해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홍콩에선 통할지 모르나 아시아 마켓에선 어려운 카드죠. 하지만 이 같은 비전형성이 이 <도>라는 영화의 성공 요인이었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뭔가 낯선 기운이 확 풍기는데요. 전혀 ‘배우스럽지’ 않은 배우들이 다부진 상반신을 드러낸 채 맨발로 어정쩡하게 모여 서 있습니다. 반 토막 난 칼 한 자루와 건장한 사내의 팔뚝도 보입니다. 이게 이 포스터의 전부입니다. 또한 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사내들, 칼, 잘린 팔. 외자 제목인 칼 ‘도(刀)’처럼 심플합니다. 관객들이 액션영화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서극 감독 역시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줘서 괜히 골치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칼 같은 뚝심이 느껴지는 포스터죠. 



[명품 포스터 20선] #19

프리 윌리(Free Willy)

           감독: 사이먼 원서 / 출연: 케이코, 제이슨 제임스 리처 / 1993년작


이미지 출처: Spetteguless.it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그린 영화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수중 생물과의 교감을 그린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촬영의 어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육지의 동물에 비해 수중 생물은 영화 출연에 알맞도록 조련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랑 블루>나 <프리 윌리>처럼 인간과 고래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그 존재 자체가 고마운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죠. <프리 윌리>는 한 소년이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 ‘윌리’를 넓은 바다로 탈출시켜준다는 내용입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도둑질과 싸움질을 일삼으며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소위 문제아입니다. 그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었던 소년이 범고래 윌리와 우정을 쌓으며 결국 자신의 순수한 영혼과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감동 요인입니다. 포스터가 워낙 유명해서 아마 많이들 보셨을 것 같은데요, 힘차게 뛰어올라 경계를 넘어가는 범고래. 그리고 그 경계 넘기에 환호하듯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든 소년. 범고래 윌리는 곧 소년의 자아인 것이죠. 세상의 평가와 잣대라는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고귀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프리 윌리>의 포스터를 보고 있노라면, 어른이 된 지금도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진답니다. 마이클 잭슨이 부른 주제곡 <윌 유 비 데어(Will You Be There)>가 제 마음 안에 울려 퍼지는 기분도 들고요. 


[P.S] 이 영화에서 범고래 윌리 역으로 출연했던 돌고래 ‘케이코’는 2003년 12월 12일 급성 폐렴 증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1995년 개봉한 <프리 윌리>의 속편은 실제 생물이 아니라 모형 범고래를 이용해 촬영되었다고 하네요. 



[명품 포스터 20선] #20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감독: 왕가위 / 출연: 양조위, 장만옥 / 2000년작


이미지 출처: IMP Awards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화려한 시절’ 쯤이 될 텐데요.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기혼자들입니다. 여자에겐 남편이, 남자에겐 아내가 있죠. 그러나 여자의 남편과 남자의 아내가 은밀히 만나 외도를 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친해지고 사랑하게 됩니다. 결혼과 함께 식어버린 줄 알았던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이 다시 두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피죠. 그러나 그 불길을 감당해낼 자신이 남자와 여자에겐 없습니다. 많은 사랑이 그렇듯, 그들도 이별을 맞죠. 마치 화염에 휩싸인 것처럼 붉은 농담의 포스터가 인상적입니다. 장만옥을 뒤에서 끌어안은 양조위. 그런 양조위의 두 손을 감싸 쥔 장만옥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짙은 콘트라스트와 함께 블러 처리된 이미지가 금세 불타버릴 것만 같은 두 사람의 격정적이고 위태로운 사랑을 잘 나타내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