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 디자인은 디자인 분야에서도 다소 생소한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대학이나 일반 교육 과정에서 쉽게 접하기도, 깊게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윤디자인그룹 서체 디자이너들의 전공은 다양하고, 회사에서 처음 서체 디자인을 배운 경우도 많습니다. 윤디자인그룹에 서체 디자이너로 들어온 신입 및 인턴사원은 서체 교육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나의 첫 서체를 제작하게 되죠.
2023년 윤디자인그룹의 신입 서체 디자이너인 정소휘 사원과 이정은 인턴 역시 그들의 첫 서체를 많은 고민과 노력 끝에 이렇게 멋지게 완성했습니다. 그들의 서체 제작 과제 스토리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월간팝송」
안녕하세요! 월간팝송을 작업한 윤디자인그룹 TDC 정소휘입니다. 저는 TDC에서 그래픽 디자인 업무를 하다가 올해 들어 서체 디자인을 배우게 된 케이스에요. 처음 배우는 과정들이 어렵고 서툴렀지만, 그만큼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얻게 되어 뿌듯합니다.
서체를 만드는 툴인 폰트랩 스튜디오 사용법부터 서체를 그리는 기본 원리, 시각 보정 등 전반적인 서체 교육은 정유권 부장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서체 교육의 보완적인 부분들은 이현승 이사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서체의 가장 기초가 되는 스페이스, 숫자, 문장부호의 너비 값, 세리프 형태와 종류 등을 주제로 스터디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유롭게 제가 만들고 싶은 첫 서체를 그려가는 과제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빛바랬지만 화려했던 그 시절의 레트로 감성을 좋아합니다. 서체 제작 과제는 자유 주제였기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감성인 ‘80년대 레트로 서체를 작업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를 2023년의 현대적 미감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서체를 기획했습니다. 2023년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1980년대와 연결 지점을 찾아 그에 맞는 컨셉을 도출하여 서체 작업을 진행하였죠.
지금 2023년은 사회적 분열과 경제적 분화, 지역 간 분차 등 갈등과 분열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들은 과거의 198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40여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갈등과 분열이 존재하는 이때, 서로 간의 화합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의 이데올로기와 갈등의 차이를 화합시켰던 88올림픽 정신을 표현한 주제곡 ‘손에 손 잡고’를 이 서체의 컨셉으로 잡았습니다.
1980년대 레터링을 2023년의 현대적 미감으로 표현하여 서체를 제작함으로써 두 시대를 연결 짓고자 했는데요, 저의 컨셉인 ‘손에 손 잡고’처럼 화합을 보여줄 수 있고, 80년대 격동적인 레터링 사이에서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월간팝송’이라는 80년대 음악 잡지 제호를 선정하였습니다. 월간팝송이 주는 단어의 의미와 획의 표현, 그리고 손에 손 잡고라는 노래에서 느껴지는 메시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저는 월간팝송 제호를 서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월간팝송의 가장 큰 추상적 이미지는 연결, 리듬감, 부드러움입니다. 각각의 디자인 키워드는 이어지는 획, 특징적인 자소, 곡선과 직선의 조화로 표현하였습니다.
기존의 제호보다 좀 더 현대적인 미감을 살리기 위해 기울기와 장식적인 요소, 곁줄기의 위치 등 가독성을 저해하는 요소는 없애고,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보이는 글자의 획과 특징적인 자소는 살리며 작업했습니다. 글줄은 중상단으로 보다 높였고, 서체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이탤릭 기울기는 빼서 기존의 월간팝송보다 리듬감이 덜 보이지만, 나중에 작업할 시간이 된다면 이탤릭의 확장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빠른 리듬감이 살아있는 종성 ㄹ, 직선적인 특징이 강한 ㄱ은 빠르게 치는 일렉기타를 표현하였습니다. 획이 흐르듯이 연결되는 ㅍ,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가진 ㅂ, 빠른 곡선미를 살린 초성 ㅅ은 부드럽게 흘러가는 건반의 리듬을 보여줍니다.
시안 문구는 손에 손 잡고 가사로 한글 61자를 파생하였습니다. 월간팝송 서체는 특징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제목용으로 돋보이고 싶을 때 사용하기 좋습니다. 기존 레트로 서체와 다른 월간팝송만의 차별점은 서체에 노래의 리듬감이 들어 있어서 좀 더 특징적이고 개성적인 느낌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서체 작업을 통해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서 우리들은 서로 손에 손잡고 화합하여 함께 나아가자는 바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일정이 여유로웠다면, 완성도를 더 높이고 라틴 글자와 이탤릭, 한글을 더 파생하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그래도 TDC의 많은 분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과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과제를 진행하면서 돈독해진 정은 님께도 수고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서체를 그리면서, 마치 하나의 작품을 장인정신으로 다듬고 만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피드백을 받고, 서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었고 커다란 경험이 되었습니다. TDC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늠름한 코뿔소가 될 때까지 「무소체」
안녕하세요! 윤디자인그룹 TDC 인턴 이정은입니다. 이번 서체 교육 과제에서 굳센 코뿔소를 닮은 무소체(가칭)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휘 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함께 서체 교육을 받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저는 특히 스페이스의 너비 값과 문장 부호에 대해 스터디해보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영문폰트, 한글폰트 가릴 것 없이 파일들을 열어보면서 어떤 규칙과 원리로 만들어내는지 탐구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띄어쓰기의 너비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고 원리가 있다는 것에서 놀랐고, 진정한 서체 디자이너로 거듭나기 위해선 정말 많은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구나 깨닫기도 했죠.
배운 이론들을 토대로 약 한 달 동안 열심히 만들어낸 무소체는 첫 사회생활을 하는 저의 의지를 담아낸 글자입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역시 프로의 세계란 약육강식, 험난한 동물의 왕국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험한 세상에서 사회초년생인 저는 그저 작고 약한 뱁새일 뿐이었고, 치열한 디자인 동물의 왕국에서 온전한 디자이너로 거듭나려면 강인함, 우직함, 강한 멘탈과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불경의 구절을 접했습니다. 어떠한 번뇌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굳은 의지로 나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소는 코뿔소인데, 코뿔소처럼 우직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정진하라는 구절은 제게 “코뿔소 같은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과 포부들을 담아 코뿔소를 닮은 강렬한 서체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서체를 기획한 후, 가장 먼저 스케치를 진행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방안지에 직접 그려보는 것을 좋아해서 이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스케치 과정에서 획의 모양 등의 특징은 일본 에도시대의 카고문자와 북한의 강한 현수막 붓글씨를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스케치를 한 후에 디지털화를 합니다. 서체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시안 문구를 그리고 기준자를 잡아 꼴별로 구조를 확립시켜줍니다. 이후 다듬고 깎아내는 장인이 된 것만 같은 시간을 계속 보내다 보면 어느샌가 좀 더 예뻐 보이는 시점이 오는 것 같습니다.
장식적인 획 표현을 가진 글자는 처음 만들어보는데, 획의 표현을 해치지 않으면서 공간을 조정하는 과정이 어려웠습니다. 두꺼운 획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균일한 속공간 조정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했습니다.
공간의 분배와 구조가 맞지 않았던 첫 스케치에서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혼’의 경우에는 첫 닿자가 뭉쳐 보이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절차의 실험을 진행했고 ‘람’은 첫 닿자의 속공간, 받침의 너비, ㄹ의 이음줄기에 변화를 주어 공간 조정을 하였습니다.
무소체는 코뿔소의 커다랗고 무거운 몸집을 닮은 두꺼운 획과 평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멋진 뿔을 닮은 날카롭고 장식적인 삐침 획 표현이 있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코뿔소처럼 힘 있게 뻗어나가는 이음보와 ㅇ의 독특한 기필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ㅇ의 경우에는 시계방향으로 획이 그려지는 듯한 굉장히 독특한 특징을 가집니다. ㅃ, ㅆ의 쌍자음에서도 획의 일부가 생략된 재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경전 내용의 일부를 추가적인 시안 문구로 잡아서 약 60자의 한글을 파생하였습니다.
무소체는 제목, 패키지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으며, 자신의 강한 의지와 목소리를 표명할 수 있는 곳에 강렬하게 쓰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기획부터 시안 제작까지 진행하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붓의 특성을 반영한 문장부호나 영문까지 파생해도 재밌을 것 같고, 현재는 제목용 HEAVY 굵기의 글자지만 이 표현을 가지고 얇은 REGULAR, 혹은 HAIRLINE의 자족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욕심이 참 많네요..)
무소의 뿔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TDC의 멋있는 선배님들♥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정말 감사했고 앞으로도 제가 어엿한 코뿔소가 될 때까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동고동락한 소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발표했을 때랑 똑같은 멘트로 마무리할게요. 늠름한 코뿔소가 될 그날까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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