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30.

[TYPE÷] 굳건하고 진실된 서체 「기사의맹세」에 관해 나눈 타입 디자이너들의 스몰토크

 

 

2023년 연재 콘텐츠 [TYPE÷](타입나누기)는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가 제작하여 새로 출시한 서체, 즉 타입(type)에 관해 나눈 타입 디자이너들의 스몰토크입니다. 서체를 만든 담당 디자이너의 영감과 제작 의도,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동료 디자이너들의 관점은 또 어떨지. 하나의 서체를 주제로 그 서체와 어울리는 공간에서 타입 디자이너들이 대화를 나누고 이를 기록하여 들려드립니다.

 

여섯 번째로 나눈 타입은 김미래 디자이너가 제작한 「기사의맹세」(🔗폰코에서 자세히 보러 가기)입니다. 용맹한 기사의 굳건하고 진실된 맹세처럼 진중하고 강직한 느낌을 표현한 서체 「기사의맹세」에 관해 다섯 명의 타입 디자이너가 진실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글. 이가희

사진. 이찬솔, 장연준, 이정은, 하지현, 정이현

 

 

 

기사의맹세÷(김미래+이가희+이정은+이찬솔+장연준)

 

 

「기사의맹세」를 제작한 김미래 디자이너

 

이가희, 이정은, 이찬솔, 장연준 디자이너

 

 

@수상한베이글

기사의맹세에 어울리는 중세 유럽의 느낌이 나는 곳을 찾다가 선택했다. 현재의 베이글 가게로 오픈한 날부터 성업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레스토랑과 스튜디오 등 업종이 다양하게 바뀌면서도 외관은 크게 바뀌지 않고 늘 이 자리에 있었다. 그 점도 성을 지키는 기사의 모습과 닮은 듯하다.

 

 

가희 어제(5월 10일) 드디어 기사의맹세가 폰코 사이트에 업로드됐잖아. 기분이 어때?

 

미래 여기 오기 전에 서체 제작 초반에 만든 기획서를 오랜만에 봤는데, 프린트된 날짜가 공교롭게도 2022년 5월 10일이더라고. 약간 소름이 돋았어. 1년이나 걸렸는데 잘 나와서 너무 만족스럽고, 서체 디자이너로서 처음 만든 서체라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재밌게 작업해서 정말 뿌듯해.

 

정은 어제 출시를 자축하면서 따로 뭐 했어?

 

미래 딱히 뭐 한 건 없고 후련하게 끝내고 집에 가서 잘 쉬면서 다음 폰트를 뭘 하게 될까 고민했던 것 같아.

 

정은 판타지 콘셉트로 시작했는데, 시작하게 된 이유와 이름의 변천사들도 설명해줘. 중간에 잔다르크도 있었고 다양한 후보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기사의맹세라고 이름 붙이게 된 이유도.

 

미래 처음 기획은 찬솔 디자이너와 같이 짰었는데, 폰코가 보유하고 있는 서체들을 보니까 제목용 폰트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걸 느꼈어. 또 요즘 OTT나 웹툰 등의 시장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고 자세히 살펴보니 장르적으로 판타지가 많이 유행하고 있더라고. 근데 판타지 안에서도 세부적인 장르가 많거든. 그중에서 기사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왕좌의 게임’ 드라마를 즐겨 보기도 했고 그런 장르가 폰트에 더 많은 특색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어. 맨 처음에 스케치한 게 시옷이었는데, 기사의 갑옷이나 투구의 곡선감이나 이음새의 특징, 날렵하고 단단한 느낌을 자소에 표현하려고 했어. 피읖, 치읓의 삐침은 투구의 형태도 생각하면서 그렸지. 그리고 이름 같은 경우는 후보 중에 잔다르크도 있었고 헤라클레스도 있었고, 관련해서 라틴어도 찾아봤는데 단어들이 좀 어렵더라고. 나는 이 서체가 너무 무거운 이름을 갖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특정 인물보다는 좀 가볍게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기사의맹세라고 정했어. 처음 시안 잡을 때 기사, 맹세 같은 단어도 있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까 그게 좋아 보였던 것 같기도 해. 역시 처음에 어떤 단어로 만드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

 

가희 요즘 TDC에서는 기사의맹세를 줄여서 기맹체라고 말하잖아. 처음에 그걸 싫어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요즘은 어때?

 

 

 

 

미래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어느새 익숙해지고, 나 자신도 기맹체라고 줄여 말하고 있더라고. 지금은 마음에 들어.

 

정은 기사의맹세 픽셀도 같이 출시했는데, 픽셀 폰트의 획은 약간 블랙레터의 느낌이 나기도 해. 세로획과의 대비가 강해서 그런가 싶고. 세리프를 일률적으로 정리하진 않았는데 어디까지 정리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

 

미래 드리거(비트맵 제작 폰트 프로그램)를 열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원래 아웃라인이 한 유닛만 옆으로 가 있어도 너무 달라지는 거야. 비트맵만의 어설픔(?)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처음에는 획을 다 정리했는데, 그러다가 다 엎고 정말 오탈자로 보이는 부분들만 수정했어.

 

정은 만약에 일률적으로 정리했으면 작은 크기에서 봤을 때 비트맵의 느낌이 안 났을 거 같긴 해.

 

 

기사의맹세 픽셀과 올드 스타일 숫자

 

 

연준 올드 스타일 숫자 작업도 했어?

 

미래 이건 기획 테스트 단계에서부터 해보고 싶었어. 중세 느낌이 나니까 올드 스타일 숫자가 있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 직접 해보니까 균형감 잡는 게 조금 어렵더라고. 높낮이가 다른 폰트를 안 해보기도 했고.

 

정은 기맹체가 시옷에서 먼저 시작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중성 줄기의 마무리가 가장 이 글씨의 인상을 많이 좌우한다고 생각했어. 이름이랑도 너무 어울리고 히든 딩벳이 검으로 들어가니까 검의 이미지가 세로획마다 붙어서 기개 있는 느낌도 들거든.

 

 

 

 

미래 시안 초반에 각도에 대해서 글꼴연구소 임광규 소장님과 피드백을 엄청 많이 주고받았어. 기둥이 계속 기울어져 보인다고 하셔서 그 부분을 마지막까지 다 수정하고, 획이 꺾이면 그 시각 보정을 하는 게 너무 어려우니까. 삭제된 만큼 어떻게 채울지, 어떻게 하면 엎어져 보이지 않을지 테스트를 많이 했어. 이런 명조꼴의 형태는 처음이라 배운 점도 많아.

 

가희 라틴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내게 됐는지 알려줘. 한글 먼저 작업하고나서 라틴 작업을 했던 것 같은데, 그 형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거든. 중세라고 하면 아까 말했던 블랙레터에서 힌트를 받았을 수도 있는데, 지금 라틴의 형태는 고정폭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비슷하잖아.

 

 

 

 

미래 라틴의 특징은 세리프야. 라틴 같은 경우에도 특징을 많이 주고 싶었는데, 조금 더 일반적인 형태를 갖고 있어야 사용자들이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포기한 부분도 있고, 자폭도 비슷한 폭으로 제작하게 됐어. 한글 같은 경우는 직선에 달린 세리프를 어디에 표현하면 좋을까 싶어서 제일 먼저 작업했던 게 기역의 세리프였거든.

 

가희 나는 한글을 먼저 봤을 때 중세의 느낌이라 라틴에서도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글자 자폭의 차이로 큰 특징을 줄 거로 예측했거든. 근데 내 예상을 빗나가서 좀 더 관심 있게 보게 되더라고. 그럼, 마음에 드는 알파벳은 어떤 거야?

 

미래 개인적으로는 Q의 꼬리 형태가 마음에 들어.

 

 

Q의 꼬리

 

 

정은 작업하면서 가장 애를 먹인 글자가 있어?

 

미래 쌍시옷이 진짜 어려웠어.

 

가희 디자이너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잖아. 기준이 되는 미음꼴은 가장 먼저 만들겠지만, 그다음은 성향에 따라 순서를 다르게 하는 것 같거든. 음식도 좋아하는 걸 제일 먼저 먹는 사람과 아꼈다가 나중에 먹는 사람이 있잖아. 기사의맹세 작업할 때는 어땠어?

 

미래 나도 하기 싫은 건 미루고 미루다가 제일 마지막에 하는 스타일이라 미음꼴을 먼저 제작한 후에 형태가 비슷한 걸 싹 작업해놓고 쌍자음들을 제일 마지막에 작업해. 기맹체도 쌍시옷을 제일 늦게 했어.

 

가희 나는 그래서 작업 중간마다 쌍자음들을 심어놓는다는 느낌으로 어려운 글자들을 하나씩 마디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 같아. 어떤 디자이너들은 중성을 기준으로 작업하기도 하더라고.

 

정은 이번엔 기사의맹세 스토리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지금까지 업로드된 폰트 중에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었던 서체는 처음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이 부분은 스토리를 짠 폰코 콘텐츠팀의 이현 에디터가 설명해주면 좋겠어.

 

 

 

 

이현 기사의맹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스토리를 하나 짜서 서체 소개를 풀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상세 페이지 디자인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았고. 왜 기사가 맹세를 해야만 하는지 그 상황을 떠올려 봤고, 히든 딩벳이 검이라 뭔가 검을 찾는 스토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시놉시스를 바로 썼어. 왕국의 이름도 폰코(FONCO)의 애너그램으로 쿤프(COONF)라고 지었고, 원래는 기사 아버지도 등장하고 왕의 배다른 동생도 등장하고… (출생의 비밀이란 언제나 먹히는 스토리지!)

 

가희 여주나 빌런이 있으면 그 세계관을 쭉 이어가서 새로운 폰트를 만들어도 재밌겠다. 윤디자인이 게임 회사 전용서체 작업을 많이 하는데, 개발 전에 폰트 추천을 요청받기도 하잖아. 그때 찾아보면 가시나무 같은 서체는 예전부터 워낙 게임에 많이 쓰이고 있어서 추천해도 채택되지 않는데, 이제 새로운 서체를 자신 있게 제안할 수 있어서 이번에 기맹체가 나오는 게 반갑더라고. 실제로 게임은 좋아해?

 

미래 내가 하지는 않고 게임 유튜브를 보는 건 좋아해. 게임을 잘하고 싶은데 그만큼 못하니까 대리만족하는 기분으로 봐.

 

정은 미래는 아기자기한 시안보단 색깔이 있고 굵직굵직한 임팩트가 있는 시안들을 잘 만드는 것 같아. 그런 게 본인의 성향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미래 성향은 잘 모르겠는데 대학교 때부터 취향이 확고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 그래서 이번에 기사의맹세가 나왔을 때도 친구들이 100m 밖에서 봐도 미래가 만든 걸 알겠다고 하더라고.

 

가희 폰코 기사의맹세 페이지 하단에서 디자이너 소개 부분에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서도 영감을 얻는 것을 좋아한다’고 썼는데, 어떤 영감인지 자세히 알고 싶어.

 

미래 내가 작업할 때 이어폰으로 노래를 많이 듣는 편인데, 시안이 너무 안 나올 때는 분위기 비슷해 보이는 음악을 듣기도 해. 기사의맹세 작업할 때는 요즘 한창 듣는 한국 밴드 ‘실리카겔’의 음악을 들었어. 엄청 특이한 노래를 많이 부르는 팀인데 신나서 좋더라고.

 

가희 이 서체가 어디에서 많이 썼으면 좋겠어?

 

미래 내가 많이 보는 게임 유튜버가 섬네일에 쓰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찬솔 어울릴 것 같다고 댓글 달아줄게. 히든 딩벳이랑 특수문자 영역도 좀 더 이야기해줘.

 

미래 손가락은 whatreallymatters(wrn)에서 1월에 전시했던 <디자인 책 – 이 책, 그 책, 저 책>에서 손가락을 포스터에도 쓰고 스티커에도 썼었거든. 그걸 보면서 손가락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기사의맹세에도 적용하게 됐어.

 

 

 

 

가희 맞아. 손에 러플 소매를 달기도 하고, 더 가늘게 표현하기도 하니까. 갑옷 장갑에 표현한 건 기사의맹세랑 너무 잘 어울리더라.

 

미래 너무 사실적으로 그리지는 않으면서도 유치해지지 않으려고 조절했어.

 

연준 히든 딩벳이 들어가는 글자가 왜 ‘’이야?

 

미래 칼을 찍는 발음과 비슷하기도 하고, 11,172 스펙이 아니라 비어 있는 글립이기도 하고, 칼과 비슷한 글자를 쓰려다가 나오는 글자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배치했어.

 

 

 

 

가희 나는 칼을 쓸 때 나오는 의성어인 줄 알았어. 마지막 질문으로 이런 스타일의 폰트가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고 생각해. 안삼열체도 있고 옵티크도 있고, 내가 모르는 다른 서체들도 많을 텐데 이런 서체들과 차별점을 주기 위해서라도 레퍼런스를 참고했을 것 같아. 참고했던 레퍼런스가 어떤 것이고, 다르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라면?

 

미래 옵티크를 많이 봤던 것 같아. 기사의맹세에서는 자소의 특징이 많이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선 시옷과 지읒에서 많은 특징을 줘야 하는데, 작업할 때 자꾸 옵티크랑 비슷해 보이더라고. 특히 라틴에서 그런 현상이 많았어. R의 획이 파여 있는 곳이라거나, i에서 점의 형태라거나.

 

찬솔 마지막으로 공식 질문. 기사의맹세체 중에 제일 좋아하는 글자는?

 

미래 이전 목선담 편에서 하나 디자이너로부터 공식 질문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했는데, 한글로 국한하지 않는다면 손가락이 제일 마음에 들어. 사람들이 기사의맹세를 많이 써서 눈에 더 익숙해지면 좋겠고, 손가락도 한 번씩 꼭 써보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