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6.

건축가의 육필, 모두의 손끝에서 기록을 짓다 [김정철 손글씨 서체]

 

2022년 6월, 정림종합건축사사무소(이하 정림건축)와 윤디자인그룹이 공동 개발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가 공개된 바 있습니다. 패밀리 구성은 [김정철 명조] 및 [김정철 고딕] 각 3종(라이트·레귤러·볼드), 총 6종. 두 서체는 1967년 정림건축을 세운 건축가 김정철 선생(1932~2010)의 10주기 기념 행사 중 하나였던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2020. 10. 9. ~ 11. 15. / 12. 4. 당선작 발표) 대상 수상작(경성대학교 건축학과 강유나 학생 응모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결과물입니다.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가 폰트 개발을 담당했습니다. 최종 배포까지 1년 반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였죠.

 

[김정철 명조]와 [김정철 고딕]이 공개된 지 6개월이 지난 2022년 12월, 비로소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프로젝트가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김정철 선생의 육필을 서체로 복원한 [김정철 손글씨] 3종까지 추가 배포되면서 모든 패밀리가 완성된 것이죠. 「건축 회사는 왜 글자를 지었을까?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이야기」의 뒷부분을 마무리지을 시간입니다.

 

글. 윤디자인그룹 미디어콘텐츠팀 임재훈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

 

 

젊은 시절의 건축가 김정철 / 이미지 제공: 정림건축

 

 누군가의 육필은 그이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는 시구(1968년 유작 「풀」)를 남긴 시인 김수영.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며 한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죠. 사후 40여 년이 지난 2009년, 한 출판사에 의해 김수영이 손으로 쓴 원고 354편이 책으로 묶여 공개되었습니다. 바로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이죠.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 소개문 중

‘육체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이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이 표현처럼 누군가의 육필은 그이의 몸의 자취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육필은 그이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건축가 김정철 선생의 육필 원고와 메모를 디지털 복원한 서체 [김정철 손글씨] 또한 그러합니다.

 

건축가 김정철 선생 육필 원고
서체 검수 과정
김정철 선생의 육필을 복원한 서체 [김정철 손글씨]

정림건축의 ‘정림’은 ‘나무와 나무가 만나 바른 숲(正林)을 이루다’라는 의미라고 해요. 김정철 선생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표어이기도 합니다. 그는 개인의 예술성보다는 조직의 단합과 협업을, 즉 나무보다 숲을 지향했던 건축가입니다. 그의 미출간 회고록 육필 원고의 제목도 『나무와 나무가 만나 숲을 이루듯』입니다. 정림건축의 기업 철학 또한 ‘사람’, ‘신뢰’, ‘탁월’, ‘지속’과 더불어 ‘함께’를 표방합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 박성재 상임이사 /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 아카이브 영상(인터뷰) 발췌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지향점 역시 바로 ‘함께’, ‘숲’이었습니다. 건축 회사가 지은 건물 안에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드나들고 머물듯, 건축계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완성도 높은 서체를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글과 기록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죠. 이러한 기획 의도는 건축가 김정철의 평소 소신이자 평생 철학이었고, 이 ‘함께―숲’의 흔적이 가장 짙게 묻어난 서체가 바로 [김정철 손글씨]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건축가의 설계 프로그램 화면 / 이미지 제공: 정림 건축
서체 디자이너의 설계 프로그램 화면

 

 

 글자로 지은 김정철의 ‘건축가상(像)’ 

 

건축과 글자는 다른 듯 닮았습니다. 우선 둘 다 ‘짓다’라는 표현이 성립되죠. 건물을 짓고, 글자를 짓는 일이니까요. 또한 건축물과 서체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고, 문화로 확장되며, 삶과 문화의 에너지로써 우리 사회에 기여합니다.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프로젝트는 서로 닮은 건축과 서체를 잇는다, 라는 생각을 반석으로 놓고 시작한 기획입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부제도 ‘건축가의 서체’예요. 그런데 이때 ‘건축가’는 사전적 의미 이상의 상징어입니다. 김정철 선생이 일찍이 강조했던 이른바 ‘건축가상(像)’이라는 개념과도 이어지죠.

 

자료 제공: 한국건축가협회
김정철 기고문 「건축가의 자세와 역할」 중 / 발췌 출처: 건축 전문지 『건축가』 1990년 12월호

건축가 김정철이 언명한 건축가상이란 “전문적 완전성”과 “창의적 노력에 의한 설계 활동”으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좋은 건축”, 그러니까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한 작품”을 짓는 사람입니다. 비단 건축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인간상이죠.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 일상과 사회 곳곳을 채울수록 세상은 보다 살 만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마치 잘 지어진 건축물처럼요.

 

김정철 선생의 이러한 철학, 즉 ‘건축가상-인간상’이야말로 이번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프로젝트의 원형이자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건축인들과 일반 사용자 모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각자의 ‘상’을 짓기를 바라는 마음. 이 의미를 담은 표어가 바로 ‘건축가의 서체’입니다.

 

2022년 6월 [김정철 명조]와 [김정철 고딕], 12월 [김정철 손글씨]로 비로소 짓기를 완공한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프로젝트. 건축계 안팎의 모든 사용자들이 이 글자를 쓰면서 저마다 자기 마음의 도면을 그리고, 이 글자 안에 내재된 튼실한 ‘자재’와 더불어 소중한 삶의 기록, 무엇보다 자기만의 올곧은 ‘상’을 지어 가기를 바랍니다.

 

 더 보기 

 ― 정림건축 김정철 서체 사이트  Award.Junglim.com

 ― 정림건축 사이트  Junglim.co.kr

 ― 정림건축 인스타그램  @junglim_architecture

 ― 정림건축문화재단 인스타그램  @junglim.foundation

 ― 〈건축가를 위한 서체 디자인 공모전〉 아카이브 영상 보기